게임업계 '집게손 검열' 광풍 후 약 4개월이 지난 지금, NC소프트 노동조합 포스터를 둘러싸고 집게손 촌극이 또다시 벌어졌다.
<오마이뉴스>가 처음으로 확인한 사태의 전말은 이렇다. 지난 6일 노조가 임금협상을 앞두고 직원들에게 가입을 홍보하는 온라인 포스터를 배포했는데, 이 포스터에도 집게손이 있다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다음 날 송가람 NC소프트 노조지회장은 "드래곤볼 만화 내 손오공 캐릭터가 원기옥(필살기)을 쓰는 장면을 연출하고자 손을 위로 들고 있는 캐릭터를 사용했지만, 밤새 긴급히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디테일한 부분까지 체크하지 못했다"며 사과글을 게시하고 포스터도 손이 보이지 않게 수정했다.
이에 일부 직원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집게손 사태가 한창일 때는 사상검증 논란에 침묵했던 노조가 이번엔 되레 마녀사냥의 피해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NC소프트 노동자 A씨는 "집게손을 비롯해 사상검증으로 (업계에서) 숱한 노동자가 해고돼도 우리 일이 아니라며 연대 성명서 하나 없던 노조가 집게손으로 공격받으니 곧장 사과문을 올렸다"라며 "(집게손 때문에) 노조를 공격하는 것도 우습지만 노조의 대응도 한숨이 나온다"라고 토로했다.
"요즘 세상에 손가락 문제삼는 건 게임업계뿐"
<오마이뉴스>는 지난 11~12일 게임업계 노동자 5명을 인터뷰했다. 집게손 사태가 비교적 잠잠해진 지금, 노동자들은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고 현재 상황은 어떤지 짚어보기 위해서였다. 노동자 5명 중 2명은 NC소프트 소속으로 직접 만나 인터뷰했고, 나머지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은 전화로 인터뷰했다.
지난 11일 판교역 인근에서 만난 NC소프트 직원 2명은 "손가락 사진만으로도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이 특정된 사례가 있다"며 사진 촬영을 거절했다. 대신 회사 출입증을 제시했다. 이들은 "(집게손 때문에) 노동자가 잘리는 것도 모자라 노조까지 검열하고 있다. 헛웃음이 난다"며 "게임업계는 자정이 불가능한 집단"이라고 직격했다.
여성인 B씨는 자신을 시니어급 개발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사상검증 논란으로 아트 직군 여성 노동자들이 업계에서 많이 잘렸다. 저는 개발직군이기에 이렇게 익명으로라도 나설 수 있었다"라며 "회사 채팅방에서 (노조 포스터의) 손가락 부분을 확대한 이미지를 캡처하며 '어떻게 우리 노조에서 집게손이 나오냐'는 식으로 싸우고 있더라. 그나마 '대체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상식적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았지만, 결국 노조위원장이 사과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팀장급 개발자라고 소개한 여성 A씨도 "요즘 세상에서 손가락을 문제 삼는 건 게임업계뿐"이라며 "(전혀) 놀랍지 않다. 직원들이 익명으로 사용하는 게시판을 보면 여성혐오적 내용이 종종 올라오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중잣대 대응... 과징금 땐 대형 로펌, 집게손엔 사죄 영상"
이들은 사상검증과 2차가해가 여전하다고 증언했다. A씨는 "그렇게 언론에서 문제라고 떠들어도 기사 한 줄 안 읽고 연예인 가십을 보듯 '잘못했으니 넥슨이 잘랐겠지' 같은 말을 한다"며 "집게손 논란이 정말 잘못됐다는 걸 토론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사측은 '괜히 불똥튀게 건들지 말라'며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마녀사냥으로 노동자가 쫓겨날 때는 (김창섭 넥슨 메이플스토리) 총괄 디렉터가 사죄 영상을 올리더니, 확률형 아이템 등장확률을 낮추고도 제대로 고지하지 않아 공정거래위원회가 116억 42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을 땐 김앤장(로펌)을 선임하지 않았나"라며 "이중잣대 대응"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게임 시스템·운영상 문제는 유저들이 시위하고, 트럭을 보내 항의해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서 페미니즘 사상검증은 내부 직원들이 먼저 적극 호응한다"며 "악성 유저들이 집게손을 문제 삼으면 (작업자를) 해고하면서, 과징금이 나온 건은 거대 로펌을 선임한다. 결국 회사와 업계 전반의 인식문제"라고 지적했다.
"예전엔 임신·출산으로 눈치 주고 압박하더니 이젠 손가락 모양으로 여성 노동자들을 검열하고 쫓아낸다. 집게손 사태는 명백히 노동권 문제다. 대한민국에서 어떤 노동자도 심지어 남성이라도 '페미'라는 이유로 내쫓겨선 안 된다." - B씨
"게임업계서 여성은 버텨서 살아남거나 사상검증에 동조하는 길만 강요받고 있다." - A씨
"노동청 점검 땐 조심... 상시적 근로감독 필요"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개발자 여성 C씨도 12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2016년 사상검증 초기 때는 (그나마 직장인 어플리케이션인) 블라인드를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졌다면, 지금은 '페미가 게임을 망친다'는 직장 동료의 말을 지나가며 들을 정도"라며 "전보다 심리적 압박을 훨씬 많이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특히 사상검증으로 게임산업의 해외 경쟁력이 후퇴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이른바 크런치모드(마감 시한에 맞춰 장기간 초과노동을 계속하는 행태)를 당연히 여기는 노동환경과 폐쇄적 조직문화 또한 여전하다는 증언도 나왔다.
A씨는 "수출을 위해 퍼블리셔(유통사)를 접촉하면 가장 먼저 받는 피드백이 '다양한 인종의 캐릭터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라며 "해외에선 사용자가 인종·성별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게 하거나, 다양성을 이미 반영한 캐릭터를 내놓는데 한국은 '여성 캐릭터를 왜 야하게 그리지 않았냐', '집게손이냐 아니냐'로 싸우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어 "웃기지만 게임업계 직원 중 스스로 회사에 속한 노동자로 인식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부분 자신이 개발 프로젝트에 소속된 구성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정규직인데도 프로젝트가 끝나면 전환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자력으로 (같은 회사 내) 다른 프로젝트 팀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봐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같은 회사더라도) 팀별 경쟁이 심하고, 윗선 판단으로 프로젝트가 불시에 접히기도 해 노동 안정성이랄 게 없는 곳"이라며 "강도 높은 노동에 야근도 잦으며 고립돼있어 사상검증이 자신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고 전했다.
C씨는 "지난해 12월 고용노동부 서울지방노동청이 (제한적이지만) 게임업계 업체에 대한 (감정노동 보호조치 위반 여부) 점검을 시행했다"며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예전엔 슬쩍 넘겼던 문제들도 제대로 대응하고, 막말 등 태도를 조심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형성됐다. 솔직히 상시적으로 근로감독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장혜영 녹색정의당 의원실에 따르면, 당시 서울지방노동청은 서울 소재 5인 이상 게임업체 523개소(자율점검)와 10개소(특별점검)를 감독해 이 중 3개소를 행정조치 했다.
남성도 마찬가지 피해 "전방위적 수정 요구"
이같은 증언과 피해 사례는 남성 노동자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10년 차 이상 시니어 게임 기획자인 남성 D씨는 12일 전화 인터뷰에서 "남성도 사상검증의 간접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업계 고위 관리자들이 '페미니즘에 동의하냐'며 질문하는 등 동조하라고 압박한다. 또 사상검증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놨다.
18년 차 시니어 게임 프로그래머인 남성 E씨도 "사상검증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 예전엔 콘텐츠를 수정하란 압박은 없었는데 지금은 전방위적으로 콘텐츠를 수정하고 개발 때부터 조심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나는 남성이어서 여성보다 부담이 덜하다"며 "개인적으로는 (여성 동료들에게) 버텨달라고 말하는 것도 주제넘다고 생각한다.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