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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초 동반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왼쪽), 부인 외제니 여사의 생전 모습. 이 소식을 전한 권리포럼 홈페이지 갈무리(https://rightsforum.org/memoriam/dries-van-agt/).
지난 2월 초 동반 안락사로 생을 마감한 드리스 판 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왼쪽), 부인 외제니 여사의 생전 모습. 이 소식을 전한 권리포럼 홈페이지 갈무리(https://rightsforum.org/memoriam/dries-van-agt/). ⓒ 권리포럼
 
지난 2월 초, 93세의 네덜란드 전 총리 부부가 자택에서 동반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또 한 번 한국 사회에 죽음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네덜란드에서도 이런 사례는 희귀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회복될 전망이 없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고 있고, 둘 다 안락사를 원해야 동반 안락사가 가능하므로 실제 사례는 많지 않다고 한다. 

네덜란드 측 보도에 따르면 2020년 13쌍, 2021년 16쌍, 2022년 29쌍이 동반 안락사를 선택했다고. 안락사가 증가인 추세와 마찬가지로 동반 안락사 역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인 듯하다. 2003년에 안락사를 선택한 사람은 1815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약 1.2%였는데, 2022년에는 총 8720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5.1%를 차지했다. 

네덜란드는 1980년대부터 죽음을 도운 혐의로 의사를 기소하는 것을 사실상 중단했다. 그리고, 2002년 안락사를 최초로 허용한 국가가 되었다. 이미 이에 대한 처벌이 없었던 과거의 관행을 보자면, 금지되었던 안락사를 허용했다기보다는 법적 틀과 규제를 마련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네덜란드는 견디기 힘들고 좋아질 가능성이 없는 고통을 겪고 있고, 반드시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에 한해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네덜란드 왕립의학협회는 안락사(조력자살 포함)를 "충분한 정보에 입각한 환자의 자발적 요청에 의한 적극적 삶의 종결"로 정의한다. 

네덜란드 안락사법의 특징 중 하나는 환자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근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의 주관적 판단에 너무 기대고 있다고 지적을 받기도 한다. (<경향신문>, '네덜란드 '정신적 고통 안락사' 논쟁', 2019. 6.26. 자 참조) 

존엄사를 다룬 다큐를 제작해 수상한 기자 케이티 엥겔하트가 펴낸 책 <죽음의 격>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를 국가의 전통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고, 적어도 평범하게 죽는 방법 중 하나라고 여기는 분위기라고 한다. 어느 교회의 임원은 일반적인 자살과 이 새로운 유형에 해당하는 죽음을 '자기 살인'과 '자기 죽음'으로 구별했다.  

지난 20년 넘게 안락사 제도가 유지 돼온 네덜란드에서조차 그 자격 조건이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왔고 변경되어 왔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특정 나이를 넘으면 전혀 고통스럽지 않을 때조차 의사조력사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부딪히는 의견과 논쟁... 네덜란드의 찬반 주장과 근거

지난 2016년, 당시 네덜란드의 보건복지체육부 장관은 '심사숙고해서 삶을 완료했다고 의견을 낸' 노인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기준을 세우자고 제안했다. '삶을 의미 있게 이어갈 가능성이 없고, 독립성 상실과 이동 능력 저하로 고통받으며, 가까운 사람들을 잃어 고독을 느끼고, 전반적인 피로와 기력 저하와 개인적인 존엄성 상실로 부담을 느끼는 나이 든 사람'에게 도움을 제공하자고 주장했다. 

장관의 이런 주장에 대해 "우리는 빈곤하거나 외로운 사람을 죽도록 설득하는 일을 허락해선 안 됩니다. 외로움과 싸우고 존엄성을 지켜내며 어르신들에게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언제나 최선의 선택입니다"라는 반론도 당시 제기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장관의 입법 시도는 실패했으나, 2019년에 한 네덜란드 국회의원이 '삶을 완료'한 노인을 위해 고안한 법안을 다시 밀어붙이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사람들한테 언제 삶을 완료할지 직접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머리에 비닐봉지를 쓰고 질식사하는 것처럼 끔찍한 선택지밖에 없어서는 안 되죠"라고 그는 밝혔다. 궁지에 몰려 비참한 자살을 선택하지 않도록 안락사라는 선택권을 주자는 것이다. 

안락사를 검토하는 심의위원회에서 9년간 일한 의료윤리학자 테오 부르는 "우리는 끔찍한 '죽음'을 막는 최후의 수단으로 안락사를 허용했는데, 이제는 끔찍한 '삶'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나아갔다"라고 말했다. (경향신문, 위 기사)

네덜란드의 안락사 감독위원회에서 10년 동안 일하다 항의 사직한 개신교 신학대 교수는, 안락사가 암 환자가 죽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간다고 지적했다. 가장 마지막 수단이어야 할 안락사가 무엇보다 우선하는 선택지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완화치료의 질이 크게 향상됐지만, 많은 환자가 이를 고려하지 않고 죽음을 요청하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어서 그는 '좋은 금기는 잘못되지 않았다, 그러한 금기가 없으면 우리는 노인이 살해당하는 사회에 도달할 것이다. 삶은 종종 완전히 비참하고 고난에 차 있다, 그런데 모든 중대하고 심각한 고통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죽음을 고려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안락사 공급'이 어떤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2002년 안락사를 최초로 허용한 국가, 안락사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네덜란드에서도 논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자료사진).
2002년 안락사를 최초로 허용한 국가, 안락사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듯한 네덜란드에서도 논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자료사진). ⓒ 픽사베이
  
한국 사회에 비해 안락사가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듯 보이는 네덜란드에서도 논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사람의 생명에 대한 문제인데, 논란이 되지 않는다면 더더욱 무섭고 이상한 일일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 이슈는 현재진행형이다. 5년 동안 척수염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온 이명식씨와 그 딸이 지난해 12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고 한다. 그들은 조력사를 허용하는 구체적인 법을 만들지 않은 것, 또한 자살방조죄의 규정이 헌법이 정한 행복추구권,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위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죽고싶다'가 아니라 계속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호소

이씨는 요즘 조력존엄사가 가능하도록 세상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탠다는 일념으로 힘든 나날을 버티고 있단다. 최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그에게 조력존엄사가 인정된다면 즉각 실행에 옮길 계획인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내 삶의 마감, 내가 정할 수 있게"… 조력 존엄사 헌법소원 낸 이명식 씨[서영아의 100세 카페], 2024. 3.11.자)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내 생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고 싶다는 거죠. 선택지를 하나 더 갖게 되면 그때 가봐야죠. 통증만 사라진다면…."

아버지의 갑작스런 질병에 간병을 오롯이 감당해내고 있는 이씨의 딸, 견딜 수 없는 고통에 괴로워하다 입원을 하면 3개월 후 퇴원하라는 병원들, 차라리 말기암 환자였다면 치료라도 받을 수 있고 치료가 안 되면 끝이라도 있을 텐데라며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이명식씨.

내게 이씨의 외침은 '죽고싶다'가 아니라 계속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호소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살아내기 위한 그동안의 개인적 노력들이 좌절되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등을 펴낸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각국의 돌봄제도는 그 사회의 사생관이 짙게 반영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개인적 노력이 좌절되었을 때 조력사의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사회는 그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일까? 개개의 경우마다 다르겠지만, 사회적 돌봄이라는 큰 틀 속에서 연명의료, 완화의료, 안락사 등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씨에 대한 논의도 조력사 허용 여부에 갇히지 않고, 한국 사회가 그동안 이씨를 어떻게 돌봐왔는지, 지금보다 나은 그의 삶을 위해 사회가 책임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아툴 가완디는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피할 수도 견딜 수도 없는 상황에서 죽음을 위해 약 처방을 할 수 있다면, 필요할 때 자기 뜻대로 쓸 수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고통받는 환자에게는 안심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사람들이 안락사에 의존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털어놓았다. 

헌법소원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씨는 고통과 싸우는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 절실한 돌봄이 주어질 수 있기를, 그래서 지난 5년 간의 삶보다는 조금 더 견딜만한 하루하루이기를 기원한다. 

#네델란드#동반안락사#안락사#헌법소원#조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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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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