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할수록 옛 모습을 닮아간다."
프랑스 혁명 후에 반동·역진이 거듭될 때 나돌았던 말이다.
필자는 지난해 고인이 된 강만길 선생이 창간한 계간지 <내일을 여는 역사> 2013년 겨울호(통권 53호)의 특집 '공안 통치의 역사와 박근혜 정부'에 <공안통치의 원조 이승만>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는데, 이 글의 서두에 앞서 언급한 말을 인용했다.
'공안통치'의 악습을 되살리던 박근혜가 탄핵되고 민주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제 다시는 부끄러운 옛 모습이 되풀이되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이 같은 기대는 무산되었다. 희망을 주문했는데 절망이 배달된 형국이다. 윤석열 정권은 검찰공화국이 되고, 국정의 주요 포스트에 검사 출신과 뉴라이트 계열이 포진하면서 역사가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남북 관계는 이미 풍전등화 같은 최악의 상태이고, 경제성장률은 25년 만에 일본에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2023년 말 현재). 이 같은 결과는 불과 집권 2년여 만에 벌어졌다.
윤석열 정부는 옛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친일·냉전 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그들을 청산하고 단죄하는 작업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뿌리는 견고하고 줄기가 강고한데, 청산 작업은 고작 곁가지를 정리하는 수준 정도였다.
해방 후 백범 김구는 "우리 사회에 군더더기 우익이 있다"라고 설파했다. 여기서 말하는 '군더더기 우익'이라는 말을 강만길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일제강점 시대의 민족해방운동전선에 참가하지 않았으면서도 해방 후에는 우익으로 자처하면서 민족문제에 나름대로 발언권을 가지려 하거나 미국에 기대어 분단국가를 만들고 그 권력 속에서 안주하려 하거나, 친일반민족행위자였으면서 시치미 떼고 우익 행세를 하는 가짜 우익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백범과 군더더기 우익>)
지금 세계는 문명사적인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 우리도 역사의 큰 물결과 작은 소용돌이가 동시에 요동치고 있다. 여기에 북녘에서는 남북한이 동족임을 거부하는가 하면 주워 담을 수 없는 막말에 가까운 적대적 언사를 날린다. 한민족·한반도·동족·동포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등 분단 이래 최악의 반민족적 언사를 총동원하고 있다.
강만길 선생이 1974년에 '분단시대'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뒤 지금까지 통용되어 온 '분단시대'가 사라지고, '남북시대' 혹은 '양국시대'라는 용어가 쓰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분단시대'를 극복하고자 무척 노력했다. 해방부터 민족통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시대적 성격을 분단시대라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는 통일사론을 정립했다.
식민사학을 극복하고자 제기한 자본주의 맹아론의 연장선에 있는 사론인 셈이다.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맹아론은 일제 식민사학의 정체후진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그는 역사의 변화·변동의 맹아를 찾고자 했고, 자신이 살아온 시대적 과제로 통일사학론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쪽 당사자가 '동족'임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아무리 당대의 권력자가 일시적인 상황에서 거부한다고 해서 '동족·민족·동포'가 사라질 리는 없다. 그러나 분단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헌신해 온 사학자가 감내하기에는 어려운 현상이다.
이런 험한 꼴을 보기 전에 지난해 눈을 감았던 것일까.
선생이 살아서 이런 현상을 지켜보았으면 어떤 마음이고,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을까?
지난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강만길 선생은 군사독재 시대에 실증주의 사학이 주류가 되어 역사(학)가 생명력을 잃고 화석화되어 갈 때 분연히 일어나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라고 외치며, 현실적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함으로써 청년들의 현실을 보는 안목을 높여 주었다.
그는 현실 참여의 길을 걷기 전까지 강단의 역사학도로서 연구와 집필에 열중했다. 그러나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꿈꾸며 유신쿠데타를 일으키고 긴급조치를 남발하면서 민주주의를 짓밟고 인권을 유린하던 1970년 중반부터 그런 처사를 더 이상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없었기에 그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식민사학의 극복, 분단의 원인 규명 및 극복 방안,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의 현재성'에 초점을 맞춰 연구하고 발언하고 참여했다. 그가 1970~80년대 발표한 전문성과 대중성을 갖춘 각종 사론(史論)은 수많은 청년과 학생들이 역사의 눈을 트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역사의 현재성'을 두려워한 독재 권력이 그를 대학에서 추방하고 투옥했으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역사학자이자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인 박한용은 강만길을 두고 "조선 후기로부터 오늘의 현실에 이르는 식민사학 극복-좌우 민족통일전선운동으로서의 민족해방운동과-분단극복과 통일-동아시아 평화공동체 지향이라는 자신만의 사관을 지니고 연구와 실천에 일로 매진한 학자는 드물다"라고 보았다.
강만길이 50여 년 동안 탐구하고 저술한 글들은 18권의 '강만길 저작집'으로 묶였다. 소설이나 시집이 아닌 연구논집으로는 보기 드문 성과이다. 그는 단순히 방대한 연구 결과를 남긴 역사학자에 국한되어 살지 않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회 이사장, 동아시아 평화·인권국제회의 한국위원회 대표, 청명문화재단 이사, <통일시론> 발행인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 정부의 통일고문회의 통일고문, 월간 <민족21> 발행인, 청암언론문화재단 이사장,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 발행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상지대학교 총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2000년 6월에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만났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에 역사학자로서 유일하게 참석하기도 했다.
필자는 그의 방대한 학문의 깊이와 폭넓은 사회활동을 충분히 담아 낼 재능은 갖지 못했다. 초기 저술인 조선 후기 상업자본과 조선시대 상공업 분야 등은 후일 전문 연구가에게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건너뛰려 한다.
강만길 선생은 자신의 표현대로 "한 번도 겪기 어려울 역사의 실험장, 즉 식민통치의 경험, 8·15의 격동, 민족상잔의 6·25 전쟁, 4·19 민중혁명, 5·16 쿠데타, 5·18 민중항쟁 등을 자기의 세대로 겪고 잠깐이나마 그 바퀴에 깔려 보기도 한" 실천적 역사학자이다. 그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시대를 인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시대의 본질을 성찰하고 실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가 1974년에 이름을 지은 '분단시대'는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더욱 강고해지고 자칫 영구화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변하고 만다"라는 그의 사관을 좇아 내일을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