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읽기 어렵다면, 언제든 책을 덮어도 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은 시간이 걸려도 꼭 끝까지 읽어가 보자고 서로 독려했다. 우리는 그렇게 읽었다. 비록 힘들었지만, 힘듦을 함께할 동료가 있어 좋았다.
제주 4·3 76주년. 4·3을 앞두고 무지개독서회에서 두 권의 책을 한 달간 함께 읽었다. 무지개독서회는 2011년부터 시작한 동네 책모임으로, 전북 군산시립도서관에 자리 잡고 한 달에 두 권의 책을 함께 읽고 있다.
4월을 앞두고 읽고 싶었던 두 작품은 현기영 작가의 <제주도우다>, 그리고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쓰자마자 느닷없이 끌려가야 했다
1978년, 현기영 작가는 4.3 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을 출판한 뒤 고초를 치러야 했다. 느닷없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해야 했으며 그의 소설은 금지되었다. 뭍의 사람들에게 4.3은 미지의 사건이었고 금기의 사건이었다.
1999년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3년 확정된 진상조사 결과 보고서를 수용한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권력에 의해 일어난 대규모 희생에 대해 제주도민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2014년 공식 국가추념일로 지정되었으니, 셈하자면 실제 4.3이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진 것은 겨우 10년에 불과하다.
책 <제주도우다>는 그저 제주를 그간 단골 신혼여행지와 유명 관광지로, 한 달 살기와 힐링을 위해 섬을 찾았던 뭍의 사람들이 4.3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손자와 손자사위를 자신의 유년 시절로 데려가는 안창세의 회고는 일제강점기에서 시작한다.
조선 시대에도 혹독한 공출을 겪었던 제주의 사람들은 탐욕스럽게 섬과 바다의 소출을 긁어가는 일제의 행위에 놀라지 않았다. 지독하게 고단했고 그 탓에 저항했을 뿐이다.
그런 중에도 소년 안창세의 하루하루는 해맑고 건강했다. 해녀이자 말을 돌보는 테우리(말과 소를 방목해 기르는 사람, 제주 방언)였던 누나 안만옥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기운찼다. 전설의 시대부터 이어진 제주의 바다와 산과 들의 빛나는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살아난다.
읽으면서 조급해지는 마음, 그럼에도
그러나, 책에서 4.3 사건이 언제 시작될지 몰라서 조마조마한 한 독자(참가자)는 사건과 무관해 보이는데 서론이 길다고 투덜대며 초조해하기도 한다. 먼저 읽은 동료가 자기도 그랬다며 조급한 마음을 달래준다.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 하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1947년 3월 1일 만세운동 기념식에서 일어난 소요를 시작으로, 1954년 9월 한라산의 금족 지역이 개방되며 7년 7개월 만에 종결되었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사람들 심신에 새겨진 사건은 단지 시간으로만 선을 그을 수가 없다. 평온하고 태연해 보이던 서론은 4.3이 일어난 배경이자, 4.3을 견뎌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제주의 힘을 보여준다.
1945년 해방공간의 감격과 희열, 새 나라에 대한 기대로 가득한 젊음은 1946년 몰아닥친 가뭄과 역병, 기아와 죽음으로 흉흉해졌다. 다시 기력을 일으켜보려 했던 1947년의 혼란을 지나 1948년 몇십 정의 총과 죽창으로 무장해야만 했던 과정이 순식간에 지난다.
중산간 마을 소개령과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질 마지막 3권에 이르면, 정말 읽기 힘들다. 유려하던 작가의 문장까지 거칠어진다. 안창세의 회고는 손자 부부가 만드는 다큐멘터리가 된다. 소설이면서 다큐인 기록이 된다.
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실은 더없이 무거운 눈을 맞으며 시작한다. 함박눈이 우리를 고요한 침묵과 바다의 밑바닥 같은 어둠 속으로 끌고 내려간다. 답답한 우울감에 빠져들게 되니, <제주도우다>나 한강의 전작 <소년이 온다>보다 읽기가 더 힘들다.
소설 속 경하는 한강 작가처럼 1980년 광주의 참상을 쓴 작가다. 먹을 입힌 통나무 수백 개가 세워진 산에 바닷물이 들이치는 꿈을 꾸며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이던 어느 날, 오래된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급하게 제주로 향한다. 손가락 절단 사고로 긴급히 서울로 호송된 인선이 집에 두고 온 새가 며칠 동안 물도 먹이도 없이 지낼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을 뚫고 중산간에 위치한 인선의 목공방에 가는 경하의 모습을 두고 잠시 우리 사이에 토론이 벌어진다. 최소한의 장비도 없이 길을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기 새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가야 했는가? 무리한 설정이 아닌가? 마침내 도착했으나 핸드폰도 잃어버리고 단전, 단수로 고립된 경하에게 '서울에 있는' 인선이 와서 대화를 나누니 책모임 동료들은 당황한다.
하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경하가 죽은 것인지 인선이 죽은 것인지, 둘 다 죽은 것인지 둘 다 살아 있는 것인지, 문학에선 단정 짓지 않아도 된다. 문학 속에서 우리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지금 내리는 눈은 그때 내렸던 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읽을수록 무겁게 가라앉지만... 결국 희망 말하는 이유
죽음의 참상을 활자로 목격하고 사진으로 읽은 작가들은 자신의 숨을 깎아 먹으며 기록한다. 증언이 소멸하지 않도록 제 몸을 전달의 도구로 쓴다.
광주를 기록하던 경하와 베트남전을 기록하던 인선은 과거를 돌아본 제 몸이 돌처럼 굳어가는 것을 알았다. 미래로 달려가지 않고 과거로 향한 벌이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참상을 여전히 껴안아 생긴 죄책감 탓이다. 기록자 자신의 삶은 어느새 과거와 죽음에 묶여있었다.
책모임 동료들은 기록자인 현기영 작가와 한강 작가의 안부를 염려했다. 밥은 잘 먹고 있는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를. <제주도우다>의 기록을 그저 허구의 소설일 뿐이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리고 싶을 만큼, 도저히 편한 자세로 읽을 수 없었던 <작별하지 않는다>의 처절함을 덮어버리고 싶을 만큼... 고작 책 두 권인데도 평안히 읽기 힘들어했던 우리는, 이를 기록해낸 기록자들의 삶을 걱정했다.
그러나 중산간 흰 어둠 속에서 죽어간 제주도민 같았던 새가 있었다. 경하와 인선은 작은 생명 하나를 매개로 서로가 있음을 기억했듯이 우리는 소설을 통해 작가를 만났다. 기록이 전하는 고통과 공포가 무섭고 힘들더라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읽어내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외면하지 않고 희생자의 단말마를,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자의 전달을 이어받는다.
과거의 우리가 저지른 참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에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난 일이라고 모른 척하는 것은 곪은 부위가 썩어가게 만들 뿐이다.
현기영 작가는 희망을, 한강 작가는 사랑을 말한다. 이렇게 읽기 힘든 책이 그럼에도 희망과 사랑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즉 독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고,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며 사회를 읽어내고 버텨내는 독자들의 연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sns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