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많은 이에게 가깝고도 아직은 낯선 덕수궁이 있습니다. 직접 그 아름다움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덕수궁을 두 발로 느끼며 발견한 이야기들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덕수궁의 숨겨진 면면들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가며, 이 고궁이 지닌 매력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기자말] |
📌 사적 '덕수궁(德壽宮)'
주소: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시대: 조선, 대한제국
탐방일: 2024년 4월 2일
덕수궁 연혁
1592년 이전: 월산대군 사저
1593년: 정릉동 행궁으로 사용
1611년: 경운궁으로 개칭
1897년: 대한제국 황궁으로 사용 시작
1904년: 대화재 발생 (중화전 등 대부분 전각 소실)
1906년: 대대적 중건
1907년: 고종의 황위 이양 후, 덕수궁으로 개칭
1910년: 석조전 완공
차량이 바쁘게 오가는 서울시청 앞, 유난히 눈에 띄는 고즈넉한 휴식처가 있다. 바로 덕수궁이다.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만들 어진 고층 건물 사이에서, 나무와 돌로 지어진 덕수궁이 이색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4월 초, 필자는 다시 한 번 덕수궁을 찾았다. 덕수궁은 한국 근대화의 상징이면서 한 국가의 쇠락을 떠올리게 하고, 현대에 와서는 문화예술과 함께하는 여러 감정이 중첩된 공간이다. 문화유산에 깊은 애정을 가진 필자에게 덕수궁은 이미 익숙한 곳이지만, 여전히 새롭게 알아갈 것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수난의 대한문
유명한 순댓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즐긴 후, 덕수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8차선 도로를 건너, 대한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한문 모습이 눈에 띈다.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 중인 것 같았다. 이 특별한 의식이 끝나기 전에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어야 할텐데!
초록색이 뜨자마자, 긴 횡단보도를 건너 대한문 앞 월대로 향한다. 월대 위에서는 오방색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조선 시대 군인들이 교대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외국인과 내국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장면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한국인도 자주 볼 수 없는 이 광경이 외국인의 눈에는 얼마나 더 신기하게 느껴질지 상상이 간다.
고종실록(1906년 4월 25일 자)을 보면 대한문(大漢門)을 대안문(大安門)으로 이름을 고쳐 지으라는 고종의 어명을 볼 수 있다. 항간에는 여러 가지 낭설이 떠돌지만 적어도 실록에는 이름을 바꾼 이유는 따로 나오지 않는다.
지금 위치는 당초 자리보다 30여m 안쪽으로 이동된 건데, 대한문이 처음 밀려난 건 1910년대다. 일제가 태평로 공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대한문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1968년에는 도심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대한문과 연결되어 있던 좌우 담장이 헐려 도로 대한문이 섬처럼 외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0년 태평로 확장 공사로 인해 문이 좀 더 궁 안쪽(현재 위치)으로 한 번 더 밀려났다.
문이 제자리를 잃은 안타까운 사실과는 별개로, 대한문의 이동 과정이 흥미롭다. <나의문화유산답사기 - 서울편 2>에서 유홍준 교수는 1970년 대한문 드잡이 장인 김천석이 해체하지 않고 기와를 제거한 뒤, 문의 기둥을 줄로 묶어 밀고 당겨, 마치 걸어가듯 대한문을 이동시켰다는 이야기로 놀라움을 자아낸다. 공사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그 모습을 '대한문이 걸어갔다'고 표현했다. 이 거대한 문이, 어떻게 틀어지지도 않고 깔끔하게 옮겨졌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대한제국 법궁의 정문으로 사용됐던 대한문(대안문)은 그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문 앞에 월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제에 의해 헐렸던 월대는 2020년 들어서야 복원 작업이 시작됐다. 월대는 3년 간의 복원을 마치고, 작년 여름부터 시민에게 개방 중이다.
하지만 월대 복원의 시작이 순탄치만은 않았단다. 일각에서는 대한문을 원래 위치로 옮긴 후에 월대를 복원해야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쪽에서는 현실적인 제약을 고려해 우선 월대부터 복원하여 덕수궁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충돌했다.
'대한문 위치부터 바로 잡자'는 측은 월대의 복원이 원 위치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본래 의미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반면, 도심 내 고층 빌딩 사이에서 덕수궁의 영역 확장을 강조한 측은, 서울 도심의 구조를 단기간 내에 대대적으로 변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불만족스럽더라도 단계적 접근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일제에 의해 손상된 월대는 2023년 여름, 마침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잊혀진 정문, 인화문
수문장 의식이 끝난 직후 매표소로 관람객이 몰린다. 필자는 기념할 표가 필요하지 않아 카드 결제로 대기 없이 입장한다. 대한문을 넘어가기 전에 인화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대한문이 예전부터 덕수궁의 정문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덕수궁의 첫 번째 정문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덕수궁은 처음부터 궁궐로 계획된 곳이 아니다. 월산대군(성종의 형)의 사저부터 시작하여 행궁을 거쳐 대한제국의 법궁으로 자리매김한, 다사다난한 역사를 가진 궁이다. 때문에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그 흔적 중 하나가 인화문이다. 인화문은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의 정전이 즉조당일 때 사용되던 정문이다.
지금은 주춧돌도 찾을 수 없지만, 중화문 앞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풍속인물사적명승사진첩에 수록된 구성헌, 대한문 위치를 통해 인화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인화문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다시 덕수궁으로 돌아올 때도 사용했고, 명성황후 국장을 치를 때도 사용되었다.
정확한 창건과 철거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명성황후 국장이 있던 1897년에 인화문을 사용했다는 기록과 대한제국 관보(1896년 11월 23일 자)에서 인화문 현판 제작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1897년 2월 이전에는 사용하고 있었던 듯하다. 1904년 중화문이 세워지면서 인화문이 사라졌다는 것이 중론이니 채 10년도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진 문이었다. 그래서 관련 기록도 거의 없다.
유일무이한 두 개의 금천
대한문에서 고작 몇 걸음 떼면 바로 앞에 돌 다리가 하나 있다. '금천교(禁川橋)'라 불리는 이 다리는 신성한 영역인 궁궐과 속세를 나누는 경계선 역할을 한다. 덕수궁은 궁 남쪽으로 흐르던 정릉동천을 끌어들여 금천으로 조성했다. 현재는 도심 개발로 정릉동천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흥미로운 점은, 덕수궁이 다른 궁과 다르게 2개의 금천교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모든 궁을 통틀어 유일무이한 사례로 꼽힌다.
필자가 서있는 금천교는 1986년 복원된 두 번째 금천교다. 그렇다면 첫 번째 금천교는 어디에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현존하는 중화전과 중화문 사이로 흘렀을 가능성이 크다.
안창모 교수는 저서 <덕수궁>(2009)에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1897)에서 상여 행렬이 돈례문을 지난 후 금천교와 인화문을 차례로 지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현재 중화전 조정에 금천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돈례문은 현재 중화전 조정 자리에 있었던 옛 문이고, 인화문은 앞서 말했듯 중화전 앞에 있던 덕수궁 초기 정문이다.
안타깝지만, 현재 금천교는 볼품없기 짝이 없다. 물길도 끊어져 흉내만 내놓았고, 대한문과 금천교가 너무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 창덕궁에 비해 위계가 낮은 창경궁도 홍화문(정문)과 옥천교(창경궁 금천교 이름)의 거리가 17~19m 정도 되는 것에 비하면 덕수궁은 채 3~5m 안팎으로 그 거리가 말도 안 되게 가깝다. 대한문이 계속 궁 내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금천교 위에서 아쉬움을 안고, 중화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누리집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이향후,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덕수궁>, 인문산책, 2023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서울 편 2>, 창비, 2017
안창모, <덕수궁>, 동녘, 2009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김종헌, <덕수궁의 복원과 보존>, 한국건축역사학회, 2004
김정동,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발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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