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길은 1954년 학부 3학년 때 홍이섭 교수의 강의 시간에 처음으로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적인 역사가인 신채호를 알게 되었다. 또 백남운, 이청원, 김한주 등 사회경제사학 계통의 연구를 접하면서 역사 공부에 더욱 열정을 쏟았다.
사회경제사학(社會經濟史學)은 '한국 역사학계의 한 학풍으로 식민지 현실인식에 기초하여 일제의 식민사학에 저항하면서 유물론에 입각한 보편주의적 관점을 보였던 역사학'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신석호의 도움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도서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하며 공부하던 중 1956년에 현역 입영 통지서를 받았다. 당시 6·25 전쟁 때 학도의용대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병역의무를 면제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재주를 활용하지 못하고 현역병으로 징집되었다. 논산훈련소에서 기초 군사 교육을, 광주 포병학교에서 측량병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뒤에 동두천 근처에 있는 독립포병부대에 배치되어 실질적인 군 복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군 복무 중에 뜻하지 않게 늑막염에 걸려 입원 치료까지 받았으나 결국 의병 제대를 해야 했다.
의병 제대 후 다시 신석호의 도움으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아연)의 한국사 전공 조교로 뽑혔다. 아세아문제연구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학 부설 연구소였다. 강만길은 이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아세아연구>의 실무를 맡았다.
강만길은 군대에 징집되기 전인 학부 3학년 때 한국 금석학 강의를 듣고 <진흥왕비의 수가신명(隨駕臣名) 연구>라는 제목으로 리포트를 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글이 고대사학회가 발간한 학술지 <사총(史叢)>(1955년 12월) 창간호에 실리는 영예를 얻었다. 비록 학생 신분으로 쓴 리포트에 불과했으나 고대사학회에서 인정할 만큼 강만길은 일찌감치 떡잎부터 달랐다.
학자, 언론인, 작가 등 글쟁이들은 누구나 활자화된 첫 작품에 마치 첫사랑과 같은 애틋함을 갖는다. 강만길의 첫 작품이 실린 <사총> 창간호에는 고려대학 사학과 교수인 김성식의 창간사에 이어 신석호의 <한말 의병의 개황>, 정재각의 <정전(井田)제도의 신 전개>, 김학엽의 <'역사의 경제적 해석'을 읽고>, 박성봉의 <해동공자 최충 소고> 등 10편의 글이 실렸다.
강만길은 '황초령비와 창령비'라는 부제가 달린 이 논문의 서두에 "당시 한반도의 동우에 위치한 신라는 중국과의 직접 교통이 불가능하여 인국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그 국세가 미쇄하였으나 이 진흥왕 대에 이르러 일약 여·제 양국과 정립케 되었던 것" (주석 1)이라며 신라 부흥기를 설명했다.
1959년에 고려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강만길은 학문을 더 깊이 탐구하고자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때 또다시 신석호의 도움으로 국사편찬위원회('국편') 촉탁으로 취직하여 학비와 생계비를 벌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식민사학이 그동안 잘못 해석한 문제들을 찾아내서 바로잡는 논문집 <국사상의 제 문제> 발간 업무를 맡았다. 이 일은 그가 식민사학을 비판하고 민족사학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색인 작업에도 참여하면서 역사에 대한 깊고 넓은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학부 시절에 고고학이나 고미술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를 전공할 생각은 없었다.
국편에 취직하자마자 대학원에 진학한 한편, 김용섭 씨와 함께 우리 역사상 특히 이른바 식민사학에 의해 잘못 해석된 문제들을 골라 바로잡는 논문집 <국사상의 제 문제> 발간을 맡았다. 신석호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병도·이홍직·김상기·이선근 등 여러 석학들이 필자로 참여했고, 이분들이 각 전문 분야의 바로잡아야 할 문제들을 택해서 논문은 써 주면 편집해서 책으로 출간하는 일이었다.
출간된 논문집에 실린 글들을 보면 알지만, 타민족의 강제 지배를 받다가 해방된 민족사회의 역사학계가 식민피지배 기간을 통해 잘못 이해되거나 왜곡된 제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려는 첫 노력이라 하겠다. (주석 2)
<국사상의 제 문제>는 4·19와 5·16을 거치면서 계속 발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강만길은 이 일을 맡으면서 각 대학의 저명한 학자들을 만나게 되고, 이들의 글을 통해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작업과 특히 타율성론과 정체후진성론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에 천착하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근무는 향후 그가 학자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국편에 취직한 직후 <조선왕조실록> 색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48책으로 압축된 영인본을 대학교수 등 전공학자들에게 한 권씩 맡겨서 책임 항목이 될 만한 어휘를 골라 붉은 줄을 쳐 오게 하고, 그 적부를 가려서 카드를 만든 후, 같은 항목의 카드를 한데 모아 정리한 작업이었다. (주석 3)
주석
1> <사총> 창간호, 고대사학회, 1955, 66쪽.
2> 강만길, <역사가의 시간>, 142쪽.
3> 위의 책, 14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