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박정희 정권은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해 모든 집회에서 이를 낭송하게 했다. 1890년에 제정된 일본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일제의 군국주의 교육 방침인 <교육칙어>를 흉내 낸 것으로, 박종홍 서울대 철학 교수의 작품이다.
독재정권의 패악은 한두 개가 아니다. 그중 특히 지식인의 어용화는 빼놓을 수 없다. 일제와 이승만 정권 시기 어용지식인에 대한 숙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과 새로운 어용군상이 생겨났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등 일련의 반민주적 법령과 조치에는 어김없이 이 어용지식인들의 지식이 동원되었다.
1978년 6월 27일, 명노근과 송기숙 등 전남대 교수 열한 명이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이들은 "민주주의 교육이 실행되지 않는 애국애족 교육은 진정한 안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 실천이 결핍된 채 민주주의보다 반공을 앞세운 나라는 공산주의 앞에서 패배한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라고 질책했다. 그 무렵 패망한 남부 베트남의 경우를 비유하는, 민주회복을 바라는 지극히 당연하고 온건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은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한 교수 전원을 대학에서 쫓아내고 더러는 구속했다. 이것이 '전남대 교육지표 사건'이다. 보도통제로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학가에서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게 되었다. 정부의 비민주적인 교육정책과 <국민교육헌장>의 강요에도 교육계가 반대 한마디 못 하고 추종하던 것을 전남대 교수들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는 대학교수 성명에 강만길도 고려대학교 교수로서 참여하기로 했다.
1978년 여름 어느 날 이미 서울대학교에서 해직되어 있던 백낙청 교수를 '창비'에선가 만났는데, 해직교수협의회 중심으로 박 정권의 국민교육헌장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대학교수 성명을 내려고 하니 동참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지금은 이른바 뉴라이트운동의 핵심 인물이 된 안병직 교수 등이 동참하기로 했으며, 전남대학교에서는 소설가 송기숙 교수 등이 동참하기로 했으니, 고려대학교에서도 동참하지 않겠느냐기에 개인적으로 동참하겠노라 약속했다. (주석 1)
강만길은 이 사건으로 '남산'을 경험하게 된다. 독재자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특수기관을 활용하는데,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국군보안사령부를 활용했다. 이승만의 경찰과 특무대, 전두환의 하나회와 비견된다. 강만길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 저술 활동과 다산연구회 모임의 언행 등을 주시해 오던 정보기관의 촉수가 그를 놓치지 않았다. 강만길은 영문도 모른 채 남산으로 끌려갔다.
그런 얼마 후 아침에 출근을 하려는데, 기관원 같은 인상의 몇 사람이 와서 물어볼 일이 있으니 잠깐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영장이 있느냐고 묻는 것조차 잊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강의가 있어서 학교에 연락을 해야 한다 했더니 그들이 연락하겠노라 했다.
가서 보니 말로만 듣던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의 지하 취조실이었다. 그러나 왜 끌려왔는지 전혀 짐작되지 않았다. 두터운 철문을 지나 지하실로 내려가서 들어간 회색빛 작은 방에는 철제 책상이 하나 놓여 있고 그것을 사이에 두고 취조받는 자와 취조하는 자의 의자가 하나씩 있을 뿐이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담당 취조자는 시내 모 대학을 나왔는데 나를 잘 안다면서 대뜸 전남대학교의 송기숙 교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며칠 전 백낙청 교수가 말하던 국민교육헌장 반대운동 관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송기숙 교수는 모르는 사람이라 대답했는데, 소설가이며 교수인 그의 이름이야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송 교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주석 2)
숙달된 중정 요원들은 그를 집요하게 추궁하고 조사했으나 혐의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사건을 조작하기에는 '영양가'가 별로 없는 사건이었다.
"주모자 격인 성내운 교수는 잠적했고, 잡혀간 이효재·강만길 두 사람은 실제로 서명한 것도 아닌데다가 사건의 전체적 진행과정도 잘 모르고 있었으니 더 캐내려야 캐낼 것이 없었다. 밤 10시경이 되었을 때 취조자의 상관으로 생각되는 50대쯤으로 보이는 자가 취조실에 와서 하는 말이 혐의가 없는 것 같으니 내보내 줄 터이니 여기에 왔던 일과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일절 말하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쓰라고 했다." (주석 3)
중정에서 풀려난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의 파견 교수로 선정되어, 그해 8월에 1년 예정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이 기간에 그는 박경식, 강재언, 이진희, 박종근, 강덕상 등 저명한 재일동포 역사학자들과 교유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이듬해 귀국한 그는 고려대학 박물관장에 임명되었다. 박물관장은 대개 고대사 교수들이 맡아온 자리여서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물리치지 못하고 이 자리를 맡아 박물관을 관리하면서 각종 자료(사료)를 접할 수 있었다.
주석
1> <역사가의 시간>, 208쪽.
2> 위의 책, 208쪽.
3> 위의 책, 21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