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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가진 자의 무기가 아니라 낮은 자를 위한 지혜가 되어야 한다.” 평생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의로운 인권변호사로서, 약자들의 벗으로서 한결같은 삶을 살다 2004년 선종하신 고 유현석 변호사님의 생전 말씀입니다. 유 변호사님은 70년대 남민전 사건, 80년대 광주항쟁, 90년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 굵직굵직한 변론으로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천에 분투하셨습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는 2009년 5월 유 변호사님의 5주기에 맞춰 유족이 고인의 뜻을 기리고자 출연한 기부금을 바탕으로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을 출범시키고, 공익소송사건을 선정하여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연재를 통해 기금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소송이 우리 사회에 남긴 변화를 되짚고자 합니다.[기자말]
 지난 6월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군인권센터,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이 연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대법원 선고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손피켓을 들고 있다.
지난 6월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군인권센터,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이 연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 대법원 선고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손피켓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2018년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대체복무제 입법과 병역거부권 인정을 위해서 싸워온 평화활동가들과 병역거부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2003년부터 대체복무제 도입을 주장해 왔으니,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단체를 만든 지 15년 만에 중요한 변화를 만든 것이다. 해방 이후 1만 9천 명이 넘게 이어지던 감옥행을 드디어 멈출 수 있을 거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헌법재판소 결정을 기다리며 재판을 미뤄왔던 하급심 법원은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무죄 선고를 쏟아냈다. 그해 11월에는 처음으로 대법원에서 병역거부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앞으로 전쟁없는세상이 할 일이 줄어들었다고 축하해주는 이도, 단체 해산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걱정스레 놀리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변화의 속도는 우리의 기대만큼 빠르지 않은데 현실은 그 속도마저 따라오지 못하기도 한다.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은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재개된 재판에서 여전히 실형이 선고되었다. 홍정훈은 2심 재판에서 1년 6개월 징역형을(2019년 9월), 오경택도 2심 재판에서 1년 6개월 징역형을(2019년 5월) 선고 받았고, 2021년 2월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며 결국 구속되어 수감생활을 했다.

홍정훈의 경우 법원은 병역거부 관점에서 군사주의 문화에 대한 그의 성찰은 평화주의가 아니라 반권위주의이기 때문에 병역거부가 인정되는 양심이 될 수 없다며 실형을 선고했고, 오경택은 양심과 양심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한 맥락적이고 입체적인 접근을 하지 않은 채 집회에 참여했다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적이 있다는 단편적인 상황만을 가지고 실형을 선고했다. 홍정훈과 오경택이 주장한 양심은 병역거부가 인정되는 양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양심의 내용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고, 양심의 존재 여부만을 가려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도 어긋나는 선고였다. 종교적 신앙에 따른 병역거부자들과 달리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정치적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병역거부자들에게 사법부의 문은 끝내 열리지 않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병역거부자 시우(활동명)의 재판도 전망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변호인의 조력 없이 진행된 1심 재판에서 재판부는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2018년 2월 21일)했다. 아직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과 대법원의 무죄 판결이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인지 재판부는 헌법재판소의 2011년 병역법에 대한 합헌 결정과 대법원의 2004년, 2007년 유죄 확정 선고를 근거 삼아 병역법 제88조 1항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헌법재판소는 입영기피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인 병역법 제88조 제1항이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는 결정을 하였고(헌법재판소 2011. 8. 30. 선고 2008헌가22 결정 참조), 대법원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위 조항에서 처벌의 예외사유로 규정한 '정당한 사유'에 해당하지 않으며, 우리나라가 가입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8조의 규정으로부터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위 조항의 적용을 면제받을 수 있는 권리가 도출되지 않고, 국제연합 자유권규약위원회가 권고안을 제시하였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떠한 법률적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라고 판결하였다(대법원 2004. 7. 15. 선고 2004도2965 전원합의체판결, 2007. 12. 27. 선고 2007도7941 판결 등 참조).

위와 같은 헌법재판소 결정 및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이 종교적 양심 내지 정치적 신념에 따라 현역병 입영을 거부하는 것이 병역법 제88조 제1항의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 (시우 1심 판결문 중)


하지만 몇 달이 지나 헌법재판소는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그해 11월 대법원에서 병역거부자에 대한 첫 무죄 선고가 나왔다. 그리고 대법원의 무죄 선고 다음 날 항소심 첫 공판 기일이 결정되었다. 2심 재판은 한 차례 연기되어 2019년 1월 2심 첫 공판 이후 다음 공판이 잡힐 때까지 무려 1년 반이 넘는 시간이 걸려서야 본격적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전쟁없는세상과 시우는 변호인을 선임해 2심에서 유무죄를 다퉈보기로 마음먹었다. 헌법재판소의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과 대법원의 무죄 판결에 따라 1심 유죄 판단의 근거가 다 사라졌기 때문에 무죄를 다투는 것도 해볼만하다는 심산이었다. 그 자신이 병역거부자였고 병역거부 재판을 여러 건 조력한 경험이 있는 임재성 변호사를 천주교인권위원회 유현석공익기금의 지원으로 선임하고 재판에 임했다.  

"일본군이 지인 여성들을..." 검사의 문제적 질문들 

하지만 무죄를 자신할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홍정훈과 오경택이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과 대법원의 무죄 선고 이후 열린 재판에서 모두 유죄 선고를 받은 탓이다. 법원은 여전히 양심을 협소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의 평화의 언어를 해석하지 못했다. 시우의 재판부는 오경택, 홍정훈과 달랐지만 불안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크지 않다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재판 과정은 불안감을 더 크게 만들었다. 검사는 양심의 존재 유무를 판단하다는 명목으로 스스럼없이 인권을 침해했다. 성공회 신자인 시우가 주말마다 교회에 갔는지 확인하겠다며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여 위치 정보를 수집했고, 페미니스트인 병역거부자의 신념을 확인한다면서 여성혐오적인 질문을 쏟아냈다.

변호인의 문제제기로 재판부가 제지한 질문들 가운데는 "피고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 존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피고인은 일본군이 성노예로 삼기 위해 피고인의 지인 여성들을 데려갈 경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요?", "피고인이 주장하는 평화의 방법으로 제2의 위안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재판에서 보여준 검사의 모습을 고려해볼 때 무죄 선고를 전망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2020년 11월 26일 2심 재판부가 병역거부자 시우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은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물론 성공회 신자이고 종교적인 신념 또한 시우의 병역거부 양심에 크게 자리 잡고 있지만) 공식적이고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신념에 기반해 병역거부를 선언한 병역거부자의 첫 무죄 선고 사례가 된 것만으로도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만, 전쟁없는세상이 주목한 지점은 오히려 판결문의 내용이었다.

재판부는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염원하는 기독교단체 긴급 기도회', '용산참사 문제 해결 1인 시위',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운동', '수요시위' 등 반전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한 경력과 '퀴어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양심 형성과 발현의 주된 근거로 보았다. 이것은 큰 변화였다.

이전까지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에서 재판부는 병역거부가 인정되는 양심을 집총거부로 협소하게 이해했다. 예컨대 병역거부자 홍정훈의 재판부는 권위주의적인 군사주의 문화를 거부하는 것은 병역거부의 정당한 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오경택의 재판부는 양심이 형성되는 기나긴 맥락을 삭제 한 채 어느 한 사건의 한 단면만 가지고 그를 평화주의자가 아니라고 판단하지 않았나.
 
 무기박람회 DX KOREA에서 무기거래를 반대하는 직접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우
무기박람회 DX KOREA에서 무기거래를 반대하는 직접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우 ⓒ 전쟁없는세상
 
양심의 자유는 양심 내용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주목할 만한 지점은 더 있다. 헌법재판소는 다수자의 양심은 사회의 일반적인 상식과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양심은 자유는 결국 다수자의 상식과 어긋나는 소수자의 양심을 보호하는 일이며, 따라서 병역거부자의 재판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은 병역거부자가 진실하게 스스로 주장하는 양심을 형성해 왔는가이지 양심 내용의 옳고 그름을 다수자의 잣대로만 따져서는 안 된다고 판시하였다.

의정부지법 항소심 재판부는 병역거부자 시우의 양심의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을 병역거부를 인정하는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주장하는 위와 같은 사고의 흐름은 국군에 대한 편향적인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나, 병역거부 사유에 있어서 '정당한 이유'의 존부 판단이 양심의 내용의 타당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중략) 그와 같은 문제는 '정당한 이유'를 인정함에 장애사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판시했다. 내용에 대한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양심의 존재/부존재를 따져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후 2021년 6월 21일 대법원이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유현석공익소송기금의 지원으로 진행한 병역거부자 시우의 재판은 이처럼 시우 개인에게, 그리고 병역거부운동에 중요한 의미로 남았다. 특히 양심의 자유에 대해 양심의 내용에 개입하지 않고 양심의 존재 여부만 살핀 점, 양심 형성 과정을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 개인의 연속적인 삶의 과정으로 바라본 점 등은 중요한 이정표가 될 지점들이라고 생각한다.

심사를 가장한 모욕주기

물론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도 있다. 사회주의자의 양심에 따라 병역거부를 한 나단은 대체역 신청이 기각되었다. 심사위원회는 "신청인은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하여 군 복무를 거부하고 있으나, 모든 폭력과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은 주체, 목적, 방법으로 행하여지는 폭력과 전쟁에 한하여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신청인의 신념은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나단의 대체복무 신청을 기각했다.

폭력에 대한 역사적이고 맥락적인 통찰을 담은 나단의 대답을 무시하거나 더러는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심사 과정 중 일부 심사위원은 나단에게 부당하고 무리하게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가치 판단을 종용하고, 나단의 답변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등 오히려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단은 이후 입영일에 병역거부 선언을 하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나단처럼 심사에서 기각된 경우는 아니더라도 많은 정치적 병역거부자들이 대체역 심사 과정에서 심사를 가장한 모욕주기와 양심의 자유 침해를 당하고 있다. 동물권 활동을 하며 폭력을 거부하게 되었다는 비건 병역거부자에게 그건 개인의 식생활 습관이라며 비꼬는 식이다. 병역거부자를 피의자 대하듯, 양심을 취조하듯 진행되는 심사는 양심의 보호라는 제도 도입의 본질을 훼손할 따름이다.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질문을 하는 심사위원들이 시우의 2심 판결문을 한 번이라도 읽어봤을까?

양심의 자유가 진정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정 안팎에서 제도의 변화와 그에 수반한 인식의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의 자유는 법원의 문턱은 넘었지만 아직은 대체역 심사위원회 문턱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했다. 양심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병역거부 운동에 남겨져 있는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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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이용석 활동가(전쟁없는세상)입니다.


#유현석#공익소송#병역거부#대체복무#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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