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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이들과 큰 서점에 들렀다. 문제집을 사기 위해서다.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아이는 아직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학교 수업과 숙제 외에는 따로 공부를 하지 않는다. 가끔 방학 때 문제집 한 권 정도를 복습 겸 푸는 게 아이가 하는 공부의 전부다. 새로운 배움에 흥미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예습은 지양하고, 공부에 대한 압박 없이 아이를 기르고 있다.

그러다 학기 초에 열린 학교 총회에서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3학년부터는 학교 수업만으로 부족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학교에서 학(學)은 가능하지만, 습(習)까지 하기는 어렵다는 것. 특히 수학과 영어의 보충을 강조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습(習)을 하기 위해 몇 가지 문제집을 사러 서점으로 향했다.

문제집은 늘 아이가 직접 고르게 한다. 자신이 직접 선택해야 즐거움과 책임감을 가질 거라는 믿음에서다. 아이에게 문제집을 여러 권 꺼내 보여주고, 직접 풀어보고 싶은 문제집을 고르게 했다. 아이는 수학, 영어 말고도 과학 문제집에 관심을 보였다. 과학을 워낙 좋아하는 아이라, 평소 즐겨 읽는 책도 과학 분야가 많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과학 문제집도 한 권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문제집의 정답과 아이의 답
 
초등학교 3학년 과학 문제집 오지선다형을 고집하는 평가 방식은 언제쯤 달라질 수 있을까.
초등학교 3학년 과학 문제집오지선다형을 고집하는 평가 방식은 언제쯤 달라질 수 있을까. ⓒ 박순우
 
며칠 뒤 아이가 푼 과학 문제집을 채점하다 틀린 문제를 발견했다. 언뜻 보기에는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문제였다. 고무, 금속, 나무, 플라스틱 막대를 준비해 서로 긁어 보았을 때, 어떤 경우가 긁히는지를 고르는 문제였다. 정답은 '금속 막대로 나무 막대를 긁었을 때'인데, 아이는 '나무 막대로 플라스틱 막대를 긁었을 때'를 정답으로 골랐다.

아이를 불러 맞는 답을 다시 골라 보라고 말했다. 아이는 처음 고른 답을 고집했다. 학교에서 실험했을 때 분명 플라스틱 막대가 나무 막대로 긁혔다는 것이다. 아이는 예외일지라도 분명 그런 경우가 존재하는데 자신이 왜 '금속 막대로 나무 막대를 긁었을 때'만을 정답으로 골라야 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이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집은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한다. 보편적으로 맞는 것을 정답으로 말해야 하는 것. 하지만 세상에는 예외가 존재한다. 아이가 실험한 도구는 꽤 오래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무 막대는 여러 아이들의 손을 거쳐가며 더 단단해졌을 수 있다. 반대로 플라스틱은 긴 세월을 지나며 작은 충격에도 쉽게 긁힐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실험을 했다면, 결과는 분명 보편적인 상식과는 다르게 도출될 것이다.

세월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어떤 금속이냐, 어떤 나무이냐에 따라서도 단단한 정도는 다르다. 알루미늄의 경우 같은 금속이지만 성질이 워낙 무르기에 다른 재료가 단단하다면 긁힐 수도 있는 것.

이 같은 예외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정답만을 고르라고 강요하는 건 옳은 일일까. 아이는 실험 당시 선생님도 교과서와 달리 예외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자신이 쓴 답도 정답이라고 버텼다.

요즘 초등학교에는 공식적인 시험이 없으니 아이가 이런 문제로 불이익을 얻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면 시험이 생긴다. 서열이 없던 아이들 사이에게 등수가 매겨진다. 선배 보호자의 말에 따르면 요즘 중학교에서는 이전과 달리 서술형 평가가 많이 쓰인다고 한다. 이전처럼 단순하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교육이 아무리 바로 서도, 대학 입시가 바뀌지 않는 한 한국 교육에 미래는 없다.
공교육이 아무리 바로 서도, 대학 입시가 바뀌지 않는 한 한국 교육에 미래는 없다. ⓒ unsplash
 
아무리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달라졌다 해도 결국 아이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다다른다. 수많은 문제들을 정해진 시간 내에 풀고, 문제마다 단 하나의 정답을 골라야 한다. 대학을 들어가는 관문이 바뀌지 않는 이상, 아이들은 지옥 같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평가의 편리만을 위한 오지선다형 시험 방식이 정말 아이들과 아이들의 삶, 나아가 우리 사회를 위한 것일까.

유럽 사회는 대부분 에세이로 학생의 배움 정도를 평가한다. 에세이는 단지 얼마나 잘 아느냐를 보여주지 않는다. 배움으로부터 뻗어 나간 학생 스스로의 생각도 포함한다. 적정한 선에서 배움 정도를 확인하고, 그걸 중심으로 사회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연습이 학생 때부터 이뤄지는 것.

이와 달리 우리 사회는 더 쉽게 아이들을 줄 세우기 위해 대입 시험에서 여전히 객관식을 고집한다. 평가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평가하는 과정의 지난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회인 것이다. 기계적으로 빠르게 문제를 잘 푸는 사람이 대학과 기업이 원하는 진짜 인재가 맞을까.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고 자르는 잔인한 방식은 언제쯤 사라질까. 그 방식의 그름을 알면서도, 사회에 쓴소리를 내기보다 아이를 위한다며 공부만 강요하는 우리 세대 부모들의 양육 방식은 또 어떤가.

홍세화씨의 위로에 펑펑 울다

입이 툭 튀어나와 문제집에 잔뜩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아이에게 결국 나는 네 말도 맞다고 말해주었다. 모든 문제가 이상한 건 아니지만, 더 빠르게 잘 풀어내는 연습을 위한 문제집이라면 벌써부터 풀지는 말자고 했다. 한창 자유롭게 생각의 가지를 뻗어 나가야 할 나이에, 아이의 사고가 자칫 사각형 문제집 안에 갇힐까 우려스러웠다. 

사실 몇 년 전 첫째를 한국의 교육 현장으로 보내면서, 나는 속절없이 불안에 떨었다. 악명 높은 한국 교육계에 아이가 발을 딛은 뒤, 순간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이 도저히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용기를 내어 찾아갔던 게 18일 별세한 대표적 진보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었던 홍세화씨의 작은 강연이었다. 

그는 당시 하얗게 머리가 새고 주름살이 늘었지만, 마음만은 영원한 청년이었다. 한국 사회에 대한 그의 일갈을 들으며 속이 시원한 동시에 답답했다. 어떻게 하면 한국 교육이 바뀔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쉽지 않다는 답변을 남겼다. 그날 강연 이후 읽은 그의 책에서 나는 예기치 못한 큰 위로를 받고 펑펑 눈물을 흘렸다.  
 
"시민사회운동 진영의 활동가가 아니라도 사회를 바라보는 상식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육의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일상적 폭력에 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교육이라기보다 차라리 집단 광란 상태라고 불러야 마땅한 그 도가니 속으로 자식을 보내면서 고민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생각의 좌표, 홍세화>
 
 2022년 5월 <오마이뉴스> 인터뷰 중 발언 중인 당시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 모습(자료사진).
2022년 5월 <오마이뉴스> 인터뷰 중 발언 중인 당시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 모습(자료사진). ⓒ 유성호
 
내 고민이 당연한 것이라는 어른의 말에 위로를 받고서야 나는 내 안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육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그 속에서 아이가 인정받기를 바랐던 것. 내 안의 모순을 지운 뒤에야 나는 아이를 교육계에 들여보낼 수 있었다.

우려도 잠시, 내가 직접 만난 공교육은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선생님들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이전보다 훨씬 포용적이고 진취적인 교육이 현장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학입시만은 요지부동이었다. 공교육에서 어떤 훌륭한 시도를 해도 모두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

아이를 학교에 보내던 첫 마음을 떠올린다. 땅 자체에 문제가 있는데, 아이가 똑바로 서지 못했다고 나무라지 않겠다 다짐했던 그 첫 마음. 아이가 더 발칙하고 삐딱하게 사고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리라. 한 시대의 어른이 떠났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았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게재합니다.


지속가능한 가치로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의미를 담아 육아 이야기를 씁니다.
#한국교육#문제집#대학입시#수능#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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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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