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일곱 명씩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터에서 죽는다. 일터에서 위험한 일을 하다 죽은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단순히 '일하다 위험하면 멈출 수 있는' 권리였을 것이다. 물론 법은 위험하면 멈출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선 '아무리 위험해도 멈출 수 없다'고 한다. 일하는 현장에선 작동하지 않는 작업중지권, 그리고 그렇게 위험해도 일하다 다치고 죽어간 노동자의 이야기. [기자말] |
한국의 산업재해 대책 논의에서 '처벌보다 예방', '안전 문화 정착'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러나 현장에 붙어 있는 '조심 조심'이라는 구호나 '안전 제일'이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캠페인을 하는 것으로 '안전문화 정착'을 생각한다면 현장 노동자들의 냉소적 비웃음만 받게 될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위험한 일은 멈추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진 다음에 일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진정한 '안전문화'이고 '처벌보다 예방'이다.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은 국제노동기구(ILO)의 기본협약인 제155호 협약에 명시되어 있다.
한국은 이 협약을 비준했고, 산업안전보건법에 노동자 작업중지권을 명시했다. 그러나 한국의 작업중지권은 협약보다 낮은 수준에서 보장되는 데다 그나마도 사문화 돼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전후로 일부 현장에서는 근본적인 중대재해 예방 대책으로 노동자 작업중지권을 실질 보장하는 자체 제도 시행이 시작됐다. 그동안은 사측이 작업중지권을 행사하는 노동자에게 징계를 하거나 손해배상 청구를 하는 등 작업중지권을 사실상 가로막아왔다.
다행히 최근 노동자 작업중지권 행사에 대한 회사의 정직은 부당하다는 대법원판결이 8년 만에 있었고, 지난 4월 4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이제는 국회가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실질 보장을 위한 법 제도 개선에 시급히 나서야 하는 시점이다.
작업중지한 노동자에게 불이익 주는 사업주, 처벌 법제화해야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있지만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인 작업중지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려면 첫째, 작업중지를 한 노동자 징계, 손해배상 청구하는 사업주 처벌 법제화가 필요하다. 1995년부터 도입된 노동자 작업중지권이 현장에서 무력화 된 것은 징계와 손해배상 청구를 남발하는 사업주에 대한 처벌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충북 콘티넨탈 사업장을 비롯해 설비 고장에 따른 작업중지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한국 타이어, 이미 노사가 합의한 안전 매뉴얼대로 진행한 작업중지를 징계에 회부한 현대 모비스 등 수많은 현장에서 소방청도, 노동부 근로감독관도, 안전공단도 인정한 위험작업에 대해 노동자들의 작업중단 요구를 회사가 거부하고 오히려 작업중지에 대한 징계와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사업주에 대한 처벌을 법제화하는 것이 작업중지권 실질 보장의 첫걸음이다.
둘째, 언제 어디서든 위험한 작업은 멈출 수 있도록 작업중지권 범위 확대가 필요하다. '위험한 작업은 멈출 수 있어야 한다'는 상식에 제동이 걸리는 건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가 '급박한 위험'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전장치가 문제 되는 기계 작업이어도, 방지 작업이 제대로 안되어 가스 냄새가 나도 급박한 위험이 아니라며 사업주는 작업을 강행한다.
안전모를 쓴 머리 위 온도가 40도가 넘어도 일을 해야 하는 건설, 조선업 노동자, 비가오나 눈이오나 위험을 무릅쓰고 배달을 해야 하는 배달 노동자, 폭우로 교통은 통제해도 톨게이트에서 일하라는 요금 수납원 노동자, 성희롱을 반복하는 고객에 대한 방문 노동을 거부하지 못하는 설치 수리 노동자 등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은 수많은 노동 현장에 필요하다. '급박한 위험'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안전보건조치가 안 되어 있는 작업, 기후, 감정 노동 등 작업중지권 행사의 범위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
셋째로는 작업 중지 기간의 하청 노동자 임금, 하청 업체 손실 보전의 법제화가 필요하다. 위험의 외주화로 위험 작업과 중대재해는 하청 노동자에게 집중된다. 그러나 원하청의 물량계약으로 진행되는 작업에서 원청의 설비, 기계, 공정관리의 위험이 발생해도 하청 노동자들은 작업거부가 불가능하다.
현대제철 인천공장의 하청 노동자들이 기중기 운반작업이 위험하다고 작업중단을 요구했지만 원청인 현대제철은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강행했다. 오히려 위험작업으로 발생한 사고를 하청업체에 떠넘기고, 하청업체는 작업중지를 하지 않았다며 하청 노동자에게 감봉 처분을 내리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하청 노동자들이 위험작업을 실질적으로 거부할 수 있으려면 작업중단에 대해 하청업체의 손실 전가나 계약 해지 등을 금지하고, 하청 노동자들의 임금 보전이 제도화 돼야 한다.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이 폭염 시 작업중지에 대한 오랜 요구 끝에 "공공건설현장은 폭염경보시 작업이 중지되고, 작업중지로 인한 공사기간이나 임금등의 손실은 보장"되도록 회계예규에 명시했다. 하청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보장을 위한 실질 대책이 공공 건설현장 뿐 아니라, 모든 일터에 도입되도록 법제화 되어야 한다.
22대 국회가 나서야 한다
넷째, 노동조합의 작업중지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제조업, 건설업, 조선업처럼 사고가 집중되는 업종에서 개별 노동자가 위험한 작업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다. 가스누출과 용접의 동시 작업, 노후 기계 문제 등 전체 공정의 위험에 대해 개별 노동자가 작업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표적인 사례로 외국 선주사의 요구로 현장의 작업중지권을 도입했던 현대중공업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결국 노동조합의 작업중지권이 보장되고 나서야 노동자 작업중지권이 정착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의 작업중지권 보장은 하청, 파견, 특수고용으로 고용과 공정, 작업이 파편화-개별화되는 한국의 일터에서 작업중지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기 위한 필수적 방안이다.
다섯째, 작업은 개선 조치가 완료된 이후 노사가 모두 동의할 때 재개해야 한다. 한국정부가 비준한 국제노동기구 ILO 협약은 작업중지에 대해 "개선조치가 되기 전에 노동자에게 작업재개를 강요할 수 없다"고 명시한다, 그러나 한국의 산업안전보건법은 규정이 없어 협약을 위반하고 있다. 작업중지 이후 개선조치에 대해서는 노동자가 판단 기준이어야 하고, 노동자, 노동조합의 동의 없이 작업재개를 하는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명시돼야 한다.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실질 보장은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기본권리이다. 그러나 작업중지 노동자에게 징계 손배를 금지한 조항에 처벌을 도입하는 산안법 개정안조차 2015년부터 수차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작업중지권을 보장하면 국가 경제 위기가 온다는 경영계와 보수여당의 황당하고도 몰상식한 반대에 번번이 좌절됐다.
전근대적인 경영계와 여당의 몰상식은 전근대적인 산재 사망의 반복으로 이어져 왔고 작업중지권을 도입해서 정착시키고 중대재해를 줄이고 있는 일터의 현실을 역행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위험한 작업은 멈출 수 있어야 한다. 22대 국회가 시급히 나서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