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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상지대 총장, 2003.6.12
▲ 강만길,단독사진 강만길 상지대 총장, 2003.6.12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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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세가 붙으면서 여기저기 찾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일부 명사들처럼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다니는 처신은 하지 않았다. 구린내 나는 단체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옛 남산골 딸각발이 선비의 길을 지키고자 했다.

1996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의 통일협회 발족에 참여했다. 경실련은 1989년 7월에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와 경제정의의 안정적 유지 등을 목적으로 시민·청년·서민 등이 결성한 시민단체이다. 발기선언문에서 '△ 모든 국민은 빈곤에서 탈피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 비생산적인 불로소득은 소멸되어야 한다. △ 진정한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금권정치와 정경유착을 철저히 척결되어야 한다. △ 토지는 생산과 생활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등을 강조하며 첫걸음을 내걸었다.

경실련은 경제정의연구소(사), 통일협회(사), 도시개혁센터(사), 갈등해소센터(사), 시민권익센터 등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운영했다. 강만길은 그중 통일협회의 이사를 지내다가 이사장을 맡았다. 그가 시민단체에 참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모든 민족 구성원이 독립운동에 참가할 것이 바람직했다면, 민족분단시대에는 모든 민족 구성원의 통일운동 참여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통일운동단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으로 경실련 통일협회 발족에 찬성하고 그 이사로 참여했다가 1996년부터 4년간 이사장을 맡게 되었다. (주석 1)

이와 비슷한 시기에 동아시아 평화·인권국제회의 한국위원회 대표(2001년까지)를 맡았고, 1998년에는 청명 임창순 선생이 설립한 청명문화재단 이사로 활동하고, 청명이 작고한 뒤(1999~2005), 그리고 2007년부터는 이사장을 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청명문화재단에서 '평화통일 진전'을 위해 발행한 계간 <통일시론>의 편집인 겸 발행인(1999~2001)을 지냈다. 오랜 세월 냉전의 빙벽을 뚫고 화해와 교류의 물꼬를 트는 데 이 잡지가 기여한 측면도 적지 않았다.

젊은 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처음 만나 강의를 들은 이래 임창순과는 평생 사제의 돈독한 우의를 유지해 왔다. 임창순은 4·19 혁명 시기 교수단 시위 때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쓴 일로 인해 5·16 쿠데타 후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청명문화재단을 만든 후 무엇을 할 것인가 했을 때 선생님이 평생 해 오신 일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가 거론되었다. 그 하나는 역저 고전국역 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통일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평화통일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사업은 구체적으로 남북화해 촉구에 목적을 둔 잡지를 발행하자는 데 합의되었고 그 결과 <통일시론>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그 편집인이 되라 해서 또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주석 2)

이 시기에 국내 정세가 바뀌어 김염삼 문민정부에 이어 1998년 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새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대북 화해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그는 1998년에 민족화해협력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으로 선임되었다. 반관반민의 조직인 민화협은 이후 남북 간의 화해협력의 막중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 중심에서 강만길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그는 1999년 2월 말에 고려대에서 정년을 맞아 퇴임했다. 학부생으로 들어가 대학원 그리고 전임교수 생활까지 38년 동안 배우고 봉직해 온 곳이었다.

해직기간까지 합치면 만 32년간 고려대 전임교원 생활을 마치고 규정에 따라 1999년 2월에 정년퇴임했다. 하나의 대학에서만, 그것도 낯익은 모교에서만 선생 노릇을 하다가 정년퇴임을 했다면 그것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히' 들어간 대학에서 학부생에서 대학원생, 그리고 전임교원까지 합치면 만 38년간 생활한 셈이다. 2009년 5월 이후 모든 공직에서 떠나 완전히 은퇴한 지금도 가지고 있는 유일한 타이틀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다. (주석 3)

대학교수에게 정년의 의미는 새삼스럽지 않을지 모른다. 직장을 떠난 것일 뿐, 직업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직접 강의를 하지 않고 학무에서 손을 떼게 되어 연구하고 글 쓰는 직업에 더욱 충실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석박사 과정을 지도한 제자 중 일부가 비용을 출연해, 근현대사 전공의 석박사 과정에 재학 중인 후배들을 위한 '공부방'을 마련하면서 강만길을 모시고자 요청했다. 그동안 준비한 자료들을 제자들과 공유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흔쾌히 뜻을 모았다. 그렇게 해서 은퇴 후에도 출근할 곳이 생겼고, 사랑스러운 제자들과도 격의 없이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공부방'의 이름은 강만길의 아호를 따서 '여사서실(黎史書室)'로 지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여사(黎史)'라는 아호를 갖고 있었는데,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검을 여(黎) 자는 여민(黎民) 즉 '일반 백성'을 뜻하기도 하고 또 여명(黎明) 즉 '동틀 무렵'을 뜻하기도 하는데, 두 가지 모두의 뜻으로 쓰고 있다." (주석 4)

그의 본령은 연구하고 글을 쓰는 일이다. 정년으로 시간이 많아지면서 제자들과 <통일지향 우리민족해방운동사>와 <한국자본주의의 역사>(창비, 2000)를 출간했다. 신진기예를 지닌 제자들과 함께 책을 출간하면서 따뜻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주석
1> <역사가의 시간>, 327쪽.
2> 강만길, <청명 선생, 백학 같은 진보주의자>, <내 인생의 역사공부 되돌아보는 역사인식>(강만길 저작집 12), 창비, 2018, 307쪽.
3> <역사가의 시간>, 323쪽.
4> 위의 책, 32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강만길평전, #강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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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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