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충격적인 만화를 보게 됐다. 노동자가 감전사고로 죽는 장면을 그린 것. 산업재해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그려진 만화로 보였다. 이 만화는 실제 일어난 산업재해 사건을 소개하고 있었다. 실제 산재 사망자 유가족이 이 만화를 보게 된다면, 그 심정은 어떨까?
위 그림 중 왼쪽은 올해 1월 8일 오전 8시 25분께 충남 서천군의 한 식품공장 신축공사 중 일어난 감전 재해를 알리는 만화다. 이것이 배포된 날은 이틀 뒤인 1월 10일. 만화는 재해자가 감전되는 순간을 옮겨놨다. 눈에는 동공이 없고, 매우 놀란 것처럼 입은 크게 벌어져 있다. 피해자 몸에 흐르는 전류를 노란색으로 표현해 효과를 더했다.
오른쪽은 2023년 11월 18일 오전 8시 45분께 전남 무안군 소재 양파 선별장에서 지게차 팔레트에 실려 있던 약 1.4톤의 양파가 선별 작업 중이던 노동자에 떨어지는 재해가 발생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특히 왼쪽 만화처럼 사람을 표현하는 것은 죽음을 희화화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만화를 배포한 정부부처는 고용노동부(장관 이정식). 해당 부처는 산업현장 노동자·관리자에게 산재 위험성을 알리고 경각심을 갖게 할 목적으로 '중대재해 사이렌'이란 이름의 콘텐츠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도 게재하고, 오픈채팅방 구독자들에게도 발송한다. 확인해보니 1년 넘게 총 600점 이상의 만화와 이미지를 사용했다. 여기엔 사업장에서 하는 일, 산업 재해 내용, 재해 종류와 발생 일자가 담긴다.
그런데 만화·이미지에선 목숨을 잃거나 다친 노동자에 대한 추모나 존중의 메시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재해 발생 순간을 자극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산업재해 피해 유가족인, 고 이한빛 PD 노동자의 아버지 이용관씨는 이 만화에 유가족 동의 여부나 고인에 대한 예의가 담겨있지 않다고 봤다.
"산업재해 피해자 신원을 익명 처리한다 하더라도, 유가족과 지인은 알 수도 있다. 사전에 유가족 동의를 구하고, 유가족이 수긍할 수 있게 표현해야 하고, 애도의 글을 덧붙여 인권 침해와 명예훼손이 안 되도록 해야 한다."
"위험에 대한 불안감·불편함 유지"라는 고용노동부장관, 그러나
고용노동부에 확인해봤다. 4월 30일 기자와 통화한 담당자의 설명을 종합하면, 중대재해 사이렌에는 고용노동부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삽화나 실제 사건에 맞게 새롭게 그린 만화가 쓰인단다.
왜 이렇게 직접적인 이미지를 쓰는 걸까. 그 이유는 이미 이정식 고용노동부장관이 밝혀놨다. 올해 초 나온 '2023 중대재해 사이렌' 발간사에서 이 장관은 영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리즌(James Reason)의 말을 인용했다.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위험에 대한 불안감과 불편함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하지만 민주노총 조합원으로 건설현장에서 6년째 목수로 일하고 있는 M씨의 생각은 달랐다.
"사실 산업재해는 짧은 공사기간과 비용 문제, 원청과 하청의 관계 등 여러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 반대로 현장 관리자들은 노동자가 안전 교육을 받은 대로 작업하지 않아서 재해가 생기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고용노동부가 관리자들의 입장만을 반영한 것 같다. 그 때문에 현장 노동자에게 다른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간단하게 요약해 자극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노동자가 이 만화나 이미지를 보고 '불편한 마음'을 갖는다고 해서 산업재해가 예방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실제 1년 이상 시행되고 있는 중대재해 사이렌이 산업현장의 노동자에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앞서 언급한 고용노동부 담당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사업 효과를 평가하는 조사 시행여부를 묻자 "(설문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의 이같은 만화 배포에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고 김용균 노동자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은 다음과 같은 바람을 남겼다.
"노동자만 주의시키지 말고, 사업주도 자신의 작업장의 위험 사항을 숙지해서 시정해야 한다. 노동부가 불시점검을 실시해 적발된 법 위반에 강한 처벌을 해야 산업재해 재발 방지 효과가 있다. 시민들에게 재래형 산업재해(떨어짐, 끼임, 부딪힘 등)가 지금도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려서 더는 일하다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시민들이 없도록 아픔을 막는 역할을 하길 바란다."
그간 산재 유가족들은 산재사망 사건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계속해왔다. 그 이유는 산업재해 사건이 알려져야 언론이 보도를 하고 재해 원인을 추적해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동력을 얻기 때문이다.
만약 중대재해 사이렌을 개편해서 다른 방식으로 제공해야 한다면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할까? 다음은 '장도리 만평'의 박순찬 화백에게 4월 30일 서면으로 받은 답변이다. 그의 말에는 고용노동부가 참조해야 할 기준이 들어가 있었다.
박순찬 화백 "노동자를 부품 아닌 인격체로 생각하며 그려야"
- 다른 사람의 죽음을 활용해 안전 홍보 만화를 그리는 것에 대해 만화가로서 어떤 생각이 드나요?
"만화 속 노골적인 묘사는 노동자가 작업 중 주의해야 할 사항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알려준다는 취지로 보입니다. 한눈에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직설적인 표현을 통해 신속한 의미 전달의 효과를 노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노동자의 안전은 이런 홍보를 통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산업현장의 안전장치 확보와 기업의 법규 준수가 선행돼야 하는 것입니다.
산업현장에서 벌어지는 재해는 전적으로 노동자의 잘못이라는 인식을 가진 의뢰자의 요구 때문에 이러한 직설적 표현의 홍보물이 나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업재해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태도가 만화에서 노동자의 철저한 주의를 요구하는 내용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재해 상황을 노골적으로 표현해 홍보하는 것은 안전 재해에 대한 기업의 책임 회피와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보통 이런 홍보용 만화를 그릴 때 유의해야 하는 것들이 있나요?
"노동자를 대상으로 안전수칙에 대한 홍보 만화를 그릴 땐 노동자를 산업현장의 부품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생각하고 친절하게 주의사항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만약 화백님께서 중대재해 사이렌에 들어가는 만화를 그린다면 어떤 내용으로 그리고 싶으신가요?
"홍보가 절실한 대상은 노동자보다 기업주와 산업현장의 관리자들입니다. 노동자의 안전한 작업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법규 준수와 안전 점검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홍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향진 기자의 블로그 <이향진 기자의 산재 로그온>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