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관은 여러분들이 하는 것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전부 엎드려뻗쳐."
"핸드폰 안 냈다가 걸린 학생들은 망치로 다 부숴 버릴 거야."
악마 같던 수련회 교관 보며 군대 두려웠지만...
국민의힘 소속 서울시의원들이 주도한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관련 기사: 결국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 "국힘 시의원들 심판할 것"
https://omn.kr/28gyl)를 바라보며 과거 학창시절 만났던 그 교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2000년생인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구한테 체벌을 당해본 적이 없다. 시대를 잘 타고난 덕분이다. 유일하게 당해본 체벌이 바로 앞서 언급한 중학교 시절 수련회에서였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시절도 벌써 10년이 넘어 다른 것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수련회 교관의 저 윽박은 지금도 생생히 귓가에서 맴돈다. 누군가가 나를 저렇게 협박하고, 마음만 먹으면 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무서웠다. 수련회 교관의 지시에 따라 흙바닥에 구르고 엎어지며 나는 평생 느껴본 적 없는 모멸감과 수치심, 그리고 공포를 느꼈다. 지금에야 왜 그렇게 그냥 당하고만 있었나 싶지만, 당시 나는 손바닥에 박힌 모래알을 털어낼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며칠 전 학생인권조례 폐지 소식을 듣고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온라인 백과사전 나무위키의 '
학교 수련회' 문서를 보니 내 나이 또래의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가진 모양이었다. 날짜별, 시간대별로 일정과 교관들의 기합‧얼차려 멘트가 적혀있는데 보면서 정말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오는 기분이었다.
교관들에게 "남학생들은 나중에 군대 가면 이것보다 더하다"라는 말도 들었기에 수련회에 다녀와서 정말 그런지 한 번 찾아봤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4년 군대에서 윤 일병 사건으로 알려진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 임 병장 사건으로 알려진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이 연달아 터졌다. 수련회의 공포는 군대에 대한 공포로 이어졌다. 내가 당해야 하는 일, 그리고 선임이 됐을 때 후임에게 가해야 하는 일이 떠올라 그 공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2020년 군대에 갔을 때, 우려하던 일은 하나도 벌어지지 않았다. 수련회에서 했던 '엎드려뻗쳐'를 군대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신병교육대 조교와 교관들도 수련회에서 만났던 교관들보다 훨씬 문명적이었다. 2013년에는 맞았던 교관의 말이 2020년에는 틀렸다. 세상이 좋아진 덕분이다. 우리 세대는 군인권센터를 비롯해 군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한 모든 이들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학생인권조례 있는 곳이 교권 침해 더 적어
요즘 학교 수련회도 내가 경험했던 그것과 달랐다. 요즘 학생들을 만나 '나 때' 수련회를 이야기하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신기해한다. 내가 '옛날 학교에서 선생님께 매 맞던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의 그런 표정이다.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있었는데...
충남과 서울에서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됐다. 서이초 교사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학생 인권보다 교권이 우선'임을 강조(관련 기사: 윤 대통령 "교권 확립 수만 교사 외침 깊이 새겨야"
https://omn.kr/250y7)하고, 이주호 교육부 장관도 사건의 원인을 학생인권조례로 돌리며 드라이브를 걸어온 흐름이 결과를 맺은 것이다(관련 기사: 72시간 농성 조희연 "학생인권조례 폐지, 윤석열·이주호 책임"
https://omn.kr/28hpb).
우선 이는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17개 교육청 중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곳은 6곳이다. 이들의 주장이 맞으려면 조례가 없는 곳보다 있는 곳에서 더 많은 교권 침해가 발생했어야 하는데, 시도별 교육활동 침해 현황을 분석해본 결과 조례가 있는 곳이 교권 침해가 더 적었다(관련 기사: 이주호, S초 사건 사과하면서도 "학생인권조례 때문"
https://omn.kr/24zlj).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교권과 학생 인권 공존‧동행하자
윤석열 대통령부터 국민의힘 서울시의원들까지, 그들의 논리는 '학생 인권이 너무 과도하니 폐지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흐른다. 하지만 과도한 인권이란 없다. 인권이 없는 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야만이다. 옛날 군대, 옛날 학교, 옛날 수련회는 다시는 반복돼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려는 이미 빠르게 현실이 됐다(관련 기사: [단독] 학생인권조례 폐지 후 벌어진 일... 서울A고 "용의검사하라"
https://omn.kr/28ihs).
물론 수련회 교관들과 다르게 공교육을 지탱하고 있는 교사들에게는 일정 정도 권위가 필요함이 사실이다. 학생의 권리가 교사나 보호자에게 침해받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교사의 그 권위도 학생이나 보호자에게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 지금같이 교권 침해가 심각한 상황이라면, 교권 보호를 위한 특별법이나 조례를 만들 필요도 있다. 더구나 서이초 교사의 죽음 앞에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아프게 다시 되새기게 된다.
그러나 교사의 권위가 학생의 인권을 침해하는 방향이어서는 안 된다. 학생인권조례는 체벌, 야자 강제, 두발 단속, 종교 강요, 임신·출산·성별·종교·나이·인종·성적지향·성적 등을 이유로 한 차별, 월경으로 인한 불이익, 불심검문 등을 금지하고 있다. 서이초 선생님이 이걸 못해서 돌아가신 것도 아니다. 원인을 정확히 짚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학생 인권과 교권은 함께 가야 한다.
'사랑의 매', '호랑이 선생님이 결국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교사의 권위는 그런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당시 수련원의 교관들을 만난다면 '멱살 한번만 잡히십시다'라고 말하고 싶다. 힘, 통제, 억압, 폭력에서 오는 권위는 그것이 역전되는 순간 정반대의 폭력을 낳는다. 이런 식의 훈육방식이 교육에 효과가 없음이 밝혀진 지도 오래다. 이건 문명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문명에서 야만으로 한 걸음 후퇴시킨 죄인으로 남지 않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