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돌아가신 지 4개월에 접어든다. 장례식장을 우리집 근처로 잡았던 터라 장례식 후 혼자 계실 아버님이 마음 쓰여 며칠이라도 함께 지내시자 청했는데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 테니 앞으로 나를 과잉보호하려고 하지 마라" 하셨다. 그러고는 "집에도 지하철 타고 가는 게 편하니 괜히 태워준다 어쩐다 하지 말고 쉬어라" 하시며 총총히 집을 나서셨다.
처음에는 장례식 마치자마자 아버님이 그렇게 가버리시니 자식들 마음도 몰라주시고 너무 하시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리 잘 해드린다고 신경을 써도 아버님 댁에서 맘 편히 지내시는 게 맞지 싶었다.
드시고 싶은 건 없으신지, 잘 지내시는지 안부를 여쭈면 언제나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신다고, 당신 걱정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먹는 것도 당신 드시고 싶은 거 사다가 잘 먹고 있으니 괜히 이것저것 사서 보내지 말라고도.
홀로 되신 시아버님
그런 대화를 이어가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어린이집에서 저녁 7시까지 맡아주니 남편과 둘이서 교대로 등원과 하원을 맡으며 지내올 수 있었다. 헌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하교 시간이 너무 일러 맞벌이 부부 둘이 감당하기에 벅찼다.
돌봄교실에 보내 보았지만 아이는 학교가 끝나고 다른 아이들이 엄마 손 잡고 집에 가고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 때 제한된 공간에서 숙제를 하며 학교에 남아 있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때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신 것이 아버님이셨다.
내 자손은 내가 챙긴다시며 매일 편도로 대중교통 한 시간 반 거리를 달려와 학교를 마친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두 아이가 학원을 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기도 하고 저녁도 먹어야 하는 오후부터 저녁 시간을 오롯이 아이들과 보내주신 거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이들 저녁 식사와 설거지까지 끝내놓고 쉬시던 아버님은 쿨하게 퇴근을 하셨다.
우리 아이들 말고도 동네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보살피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아버님은 그중에서도 유명하셨다. 한번은 아이 이발을 하러 미용실에 데리고 갔더니 아이를 알아본 미용실 원장 선생님이 아버님 얘기를 꺼냈다.
"아, 할아버지와 함께 오던 친구네? 엄마는 처음 보네요. 할아버지가 아이들한테 어찌나 인자하신지 몰라요. 손주 데리고 다니기 힘드실만도 한데 이 댁 할아버지는 늘 웃으시고 아이 혼내는 거 한 번도 못 봤어요."
보통의 할아버지와 조금은 다른 아버님의 자손 사랑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아버님은 실향민이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아버님 고향이었던 황해도도 UN의 치하에서 정상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때, 압록강에서 중공군이 밀고 내려오기 전 잠깐의 평화기에 고향을 찾은 친척의 지프차에 끼어 타고 혼자 피난을 왔다고 한다.
집을 정리하고 뒤따라 내려오겠다고 너 먼저 내려가 기다려라 하셨던 나머지 가족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서울의 어느 병원 앞을 매일 같이 서성였지만 서울까지 뚫려 부산으로 피난을 가셔야 했다. 후에 이산가족 찾기에도 나서 보았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셨다.
그렇게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아버님은 인생의 고비고비에서 누가 날 아주 조금만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고 하셨다. 물에 빠져 허우적댈 때 박차고 올라갈 굳은 땅이 한 뼘이라도 발밑에 있었으면 바랐던 그 마음으로, 아들 내외가 초등학생이 된 두 아이를 키워보려고 허우적 댈 때 딛고 일어설 한 뼘의 굳은 땅을 자처하셨던 것이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졸업을 하기까지 6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내가 그런 마음으로 내 손주들을 돌보노라 하는 생색 한번 없이 일하는 며느리를 도와주셨다.
며느리가 마련한 이벤트
어떤 일보다도 아이들 챙기는 일을 우선으로 하셨지만 한 달에 한 번 친구분들과 만나는 계모임은 아버님이 기다리는 즐거운 이벤트 중 하나였다. 고등학생의 나이에 전쟁을 겪고 남한으로 내려와 뿌리 내리고 사는 동향의 친구들이 계셔서 흉금을 터놓고 지내실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또 세월이 흘러 어느덧 아버님의 계모임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구순을 넘으신 아버님의 친구분들은 이제 돌아가시거나 살아 계셔도 침상을 벗어나지 못해 함께 식사 모임을 할 수 있는 분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한 분씩 부고를 전하시는 아버님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시지만 괜찮을 리가 없다. 이제 어머님까지 돌아가셨으니 내가 아버님과 계모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주 찾아 뵙고 집을 정리해드리고, 반찬을 해다드리는 돌봄이 필요 없으실 정도로 자기 돌봄을 잘 하시니 나는 아버님이 기쁘게 기다릴 이벤트가 되어줄 계모임을 만들어야겠다고 말이다. 남편은 현재 해외에서 일하고 있으니, 일단은 우리끼리만.
연세는 많으셔도 아직 바깥 출입이 가능하신 지금이 우리 계모임의 황금기가 아닐 수 없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어서 아버님과의 첫 계모임은 친구와 약속이 있던 주말 외출을 한 김에 아버님과 먼저 만나 식사를 하는 걸로 했다.
친구가 어떻게 시아버지와 밖에서 만나서 식사할 생각을 하냐고 신기해 했지만 이것도 아버님이 먼저 하셨던 일이다.
결혼 초기, 아이들이 어릴 때 시댁이 회사 근처였다. 어느 해, 내 생일날 아버님이 점심시간에 회사로 와서 갈비탕을 사주고 가셨다. 시집 와서 아이 키우고 돈 버느라 고생이 많다고 그래서 생일 밥 한 끼 먹이고 싶다고 하시면서. 그러니 나에게는 딱히 새로운 아이디어도 아니었던 셈이다.
그렇게 시작된 아버님과의 계모임은 십대 손주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이벤트가 되었다. 십대 손주가 할아버지와 외식을 하러 기꺼이 주말에 시간을 내는 것도 신기하다고? 아이 키워준 공은 없는 거라지만 아버님과 아이들의 관계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아버님이 아이들에게 들인 정성은 친밀감으로 아이들 안에 들어 있었다.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느슨하게 아버님과 자손들의 계모임 황금기가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서울에 있는 온갖 명소와 맛집들을 다 섭렵하게 될 때까지. 그 연세에 외출을 해도 되는 거냐고? 당연히 된다. 아버님을 보니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어제처럼 오늘을 살면 되지 싶다.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나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