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한번도 버스를 타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에서 버스는 익숙한 존재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경우에도, 밤늦게까지 야근한 경우에도 버스는 달리고 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버스는 달리고 있다. 많은 노동자가 출근하지 않는 명절이라고 다르지 않다. 명절에도 버스는 달리고 있다. 그러고보면 신기하다. 어쩜 버스는 한결같이 도로를 달리고 있을까? 마침 버스 운전을 하는 레즈비언 노동자가 있다는 소식에 우리는 냉큼 인터뷰를 제안했다.
새벽 3시부터 밤 11시
"오늘같이 하루 종일 쉬고, 다음 날 하루 종일 일하고. 그러니까 남들 이틀치를 하루에 일하는 개념이에요."
그랑씨는 격일제 근무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하루 일하고 하루 쉬는 것이다. 버스 운전사의 하루는 굉장히 일찍 시작한다. 출근하는 날에는 첫 차를 기준으로 출근한다. 그게 대략 새벽 3시이다. 출근하자마자 구내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새벽 3시에 밥을 먹는다니, 속이 부대끼지 않을까 걱정된다. 하지만, 그때 먹지 않으면 점심까지 밥을 먹을 수 없으므로 일단 먹는다. 도로를 달리고 있는 버스를 위한 식당은 없으니까.
그리고 버스 운행을 시작한다. 그러다보면 점심시간이 다가온다. 우리와 점심 시간이 다르다. 오전 9시에 점심을 먹고, 오후 3시에 저녁을 먹는 식이다. 그리고 밤 11시까지 버스를 운전한다. 어마어마한 노동 시간이다. 누군가는 앉아서 하는 노동이니, 그나마 괜찮지 않냐고 질문할지 모른다. 버스는 잠깐이라도 졸아도 안되고, 다리에 쥐가 나도 쉴 수 없다.
딸 같아서
다양한 사람이 버스를 이용한다. 대체로 좋은 승객이 많다. 방금 시장에서 샀다며, 떡이나 과일을 건네주는 따뜻한 승객도 있다. 어린이 승객이 탈 때면 혹시나 넘어지지 않을까 짐짓 신경이 집중되지만, 버스에서 내리면서 귀여운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슬며시 웃음도 난다. 그러나 모든 승객이 좋은 것은 아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말 할 수 있냐? 당신은 딸도 없냐?"
하루는 술에 취한 것같은 승객이 그랑씨가 운행하는 버스를 타며 "에이~ 여자가 재수 없게"라고 말했다. 그랑씨가 무슨 말씀이시냐고 바로 따졌다. 그러나 그 승객은 아무 대꾸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랑씨는 운전하는 몸이다. 화가 난다고 달려가 따질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다른 자리에 앉아있던 승객이 "지금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런 말 할 수 있냐? 당신은 딸도 없냐?"며 대신 따져줬다. 그리고 그랑씨에게 신경쓰지 말라며 당부의 말도 전했다. 그랑씨는 일터에서 딸같다는 표현이 좋은 의미에서 들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남자친구는 있어? 결혼 생각은 있어?"
흔히 버스 운전사는 중년 남성으로 상상된다. 그랑씨의 일터에도 중년 남성 노동자의 비율이 월등히 높다. 동료들은 그랑씨와 자녀의 나이가 비슷해서인지 대체로 따스하게 대해주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때론 석연찮은 순간이 있다. 다음 운행을 하기 전에 주어지는 짧은 휴식 시간에 남자친구나 결혼에 대한 질문을 하는 동료들이 종종 있다.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안 해요. 가족들도 안 한다고 알고 있어요"라고 웃으며 답하곤 한다.
그동안 많은 성소수자 노동자가 일터에서 접하는 남자친구나 결혼에 대한 질문이 불편하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동의한다. 그런데 어떤 부분에선 중년 남성에게 이런 질문은 친밀함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중년 남성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짧은 휴식 시간 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서로에게 접점이 없으니 본인이 생각하기에 무난한 주제를 물어보는 것이다. 그랑씨도 나쁘지 않은 마음으로 물어보는 동료에게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고민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이가 어려보이면 더 무시하거나 함부로 하는 승객들이 있어. 나이가 좀 들어 보이게 머리를 바꾸는 게 어때?"
하지만 딸같다는 이미지는 다른 의미에서 어려보인다는 의미이다. 일터에서 어려 보인다는 의미는 그다지 좋지 않다. 모두 청년 시절을 거치지만, 고객에게는 어린 티가 덜 나야 한다. 그랑씨도 나이가 어려보이면 무시받기 쉬우니 머리 스타일을 바꾸는게 좋을 것같다는 애정 어린 조언을 들었다. 그래서 버스 운전사를 시작하며 성숙해보이는 헤어 스타일로 바꿨다. 나의 나이가 노동에 영향을 미치는게 어째서 낯설지 않을까.
오줌을 마음 편하게 쌀 수 있는 권리
"하늘이 노래지긴 했지만, 대변이 참아지긴 하더라고요. (웃음)"
버스정류장에 있는 전광판에는 버스가 언제 도착할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시간을 맞추지 못 하면 고객들의 원성을 듣는다. 그러므로 버스는 제시간에 출발해서 종점까지 가야 한다. 그나마 그랑씨의 회사는 "버스 운전사를 많이 배려해주는 회사"이다. 버스 운전사가 운행을 끝나고 복귀하면 다음 버스를 운행하기 전까지 잠깐이라도 쉴 수 있도록 신경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식 시간에 볼 일이 모두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랑씨도 배탈이 났던 순간에 지사제 4알을 먹고 버스를 운전했던 적이 있다. 그랑씨처럼 많은 노동자가 일터에서 속시끄러운 순간을 마주한다. 모두가 화장실을 가지만, 애석하게도 노동자의 속사정은 각자 알아서 해야 할 문제로 작아진다.
"불편하다고 생각하면 끝도 없이 불편해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이건 성중립 화장실이구나!"
그랑씨의 회사는 사무직원들이 있는 본사와 버스 운전사들이 있는 종점 사무실로 구분된다. 본사에는 여성과 남성 화장실이 각각 존재한다. 하지만, 버스 운전사인 그랑씨가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종점 사무실에는 공용 화장실만 존재한다. 그랑씨는 넓은 의미에서 성중립 화장실이라고 생각한다고 웃었다. 일터에서 상대적으로 비율이 낮은 성별의 노동자는 화장실조차 구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집에 화장실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은 당연하다. 일터는 노동자에게 또 다른 집이다. 일터에 마음 편하게 갈 수 있는 화장실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도 당연해져야 한다.
바빠서, 화장실이 없거나/멀어서, 사람에 비해 화장실이 부족해서 등 일터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볼 일을 후딱 보거나, 아예 참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이 당연한 것일까? 노동을 시작하고 방광염과 지사제의 존재를 알게 되는 현실은 씁쓸하다. 이에 더불어, 그랑씨는 진정한 의미의 성중립 화장실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이야기했다. 구색 맞추기를 위한 공용 화장실과 우리가 원하는 모두의 화장실은 간극이 있다. 우리는 이 간극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현장에서, 무슨 노동을 하든 마음 편하게 화장실에 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겐 편안하고 쾌적한 화장실이 필요하다.
오늘도 버스는 달린다
"기사님이 젊으니까 조언 한마디 해줄게. 본인 직업에 자부심을 가져!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대중교통을 책임지는 거야!"
새벽에 버스를 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예상과 다르게 승객이 많다. 버스가 없었다면, 움직이기 쉽지 않은 시간이다. 그랑씨는 첫 차를 운행하는 순간마다 버스를 바삐 오르는 승객들을 바라보며, 자신이 누군가의 노동에 도움이 된다는 자부심이 든다고 말했다. 다른 시간도 비슷하다. 버스가 없으면 집에서 외출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도 꽤 있다. 그랑씨의 노동은 누군가의 일상에도 도움이 된다. 일터에서 느끼는 자부심이라는게 이런게 아닐까. 나의 노동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뿌듯함과 책임감. 카드 단말기에 가려져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오늘도 그랑씨 묵묵히 버스를 운행한다. 오래도록 도로 위의 버스에서 그랑씨를 만날 수 있길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노동권팀 홈페이지 http://rainbowatwork.org 에도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