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대표라는 분이 '백혈병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고 하더군요. 정말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있나 싶어, 허탈하고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죄송하다'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지…"
담담했다. 가끔 깊게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안타까움이 그대로 전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이아무개씨의 목소리였다. 그는 최근 삼성전자 휴대폰 사업장에서 일하다 백혈병 판정을 받은 이수현(가명)씨의 아버지다.
이씨는 지난 13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건강한 아들이 일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해서 (힘들어도)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한 것 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이어 "공장에서 손가락 골무 하나에 마스크도 자기 돈으로 사서 쓰고, 하루에 수천개씩 휴대폰 조립을 반복으로 했다"면서 "피곤해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갑자기 백혈병 진단을 받아 초췌해진 아이를 보고 있으면 너무 비통하고 원망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이수현씨는 올해로 스물 한 살. 3년 전인 지난 2021년 10월부터 경남 구미의 '케이엠텍'이라는 회사에서 일했다. 삼성전자의 고가 휴대폰인 갤럭시 에스(S) 시리즈인 S21부터, S22, S23, 그리고 폴더폰인 제트플립(Z-flip)의 조립 업무를 했다. 납땜이 돼 넘어온 휴대폰 기판 위에 플라스틱 부품을 붙이는 일이었다. 하루에 적게는 1800개에서 많게는 3000개까지, 조립하고 테스트했다.
갤럭시 조립하던 21살 청년, 백혈병으로 쓰러지다
이씨는 특성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일을 시작했고, 대학 입학 후 일과 학습을 함께 했다.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며 최저시급으로 한달에 150여만 원 남짓의 돈을 받았다. 참을성이 많던 이씨는 일이 힘들어도 부모에게 내색하지 않다가 2023년 9월 갑자기 쓰러졌다.
진단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 아버지 이씨는 "병원에서 백혈병이란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면서 "뒤늦게 병원에서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매일 울었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아팠다"고 토로했다.
이씨의 작업현장 상황을 면담한 이종란 노무사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부품을 조립하기 전에 기판 위에 묻은 먼지나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에어건(Air Gun)을 매번 사용했는데 그때마다 과일 향과 기름 냄새가 났다고 한다"고 전했다. 또 해당 부품조립한 후 휴대폰 뒷면을 고온으로 붙이는데, S21와 S22, S23 기종은 방수폰이라 특히 고온에서 접착제가 녹아 유해물질이 나올 가능성도 매우 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 노무사는 "작업 현장이 배기와 환기가 잘 되지 않아 공기 질도 좋지 않았고, 고온 압착 과정에서 수증기와 함께 이유를 모르는 시큼한 냄새도 났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휘발상 유기 화합물 및 벤젠, 포름알데히드와 같은 백혈병을 유발하는 발암성 성분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환경시민단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집 떠나 기숙사서 최저임금으로... 발병 후 돌아온 것은 '해고와 퇴학'
하지만 회사에서 쓰러진 후 무급으로 4개월 동안 힘든 항암치료를 받던 이씨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와 '퇴학처분'이었다. 이씨 아버지는 "아이 치료에 정신없던 시간내내 사장 뿐 아니라 회사쪽 관계자 누구 한 명 찾아오지 않았다"면서 "'퇴사하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회사에서 강제로 고용계약을 해지했다"고 말했다.
해고 사실도 뒤늦게 건강보험이 해지됐다는 통보를 받은 후에 알았다. 그는 또 "영진전문대도 힘든 투병중인 아이에게 3개월 만에 퇴학 처분을 내렸다"면서 "일과 공부를 함께할 수 있다고 선전해서 아이들을 뽑아놓고, 이제와서 가차없이 내버려졌다"고 전했다. 영진전문대는 수현씨가 2년 과정인 '일학습병행 과정'을 이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퇴학 처분을 내렸다가, 이후 자퇴를 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와 환경시민단체 등은 지난달 17일 회사를 상대로 부당해고 취소와 함께 산재보험 요양 등을 해당 지방 근로복지공단과 노동관청 등에 제기했다. 이같은 이씨의 사연이 일부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뒤늦게 회사도 움직였다. 회사 대표이사와 공장책임자가 이씨 가족에게 연락을 해 와, 지난달 22일 부산에서 첫 번째 공식 만남을 가졌던 것.
이 자리에서 케이엠텍 사장 등 회사쪽 관계자는 진솔한 사과 대신, '현장 공기 질은 깨끗하다', '백혈병이 심각한지 몰랐다', '피해자가 아니다' 등 변명과 무책임한 발언을 건넨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 아버지는 "기자회견이 있은 후에 회사쪽에서 연락와 2시간여 동안 만났다"면서 "사장은 '우리 직원들 혈압과 당뇨 등 건강을 챙기고 있다'면서 정작 아이 백혈병에 대해선 '보고 안 받았다', '피해자라는 말을 쓰지마라, 산재가 아니다'라는 말만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백혈병 책임은 부모', '국회가서 법 바꾸라'는 회사대표 말에 가슴 미어져"
이어 회사대표는 치료비 지원을 위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백혈병 걸린 1차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국회 가서 법을 바꾸라'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괴감마저 들었다"면서 "그 자리에서 회사 대표의 진솔한 사과와 함께 부당해고 철회와 재발방지 대책 등을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나'라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이씨는 덧붙였다.
이씨 사연이 알려진 후, 국내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잇달아 비판 성명을 내고 있다. 대구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등 대구경북지역 27개 단체는 지난 9일 "삼성전자 1차 협력업체 케이엠텍에서 2년간 '갤럭시' 조립 노동의 결과가 급성 골수성 백혈병, 강제퇴사, 퇴학이라니 도대체 누구의 잘못인가"라며, 강제퇴사와 퇴학을 즉각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협력업체 행동규범을 강조해왔던 삼성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책임져야 한다"면서 "행동규범대로 케이엠텍의 노동현장과 반인권적인 대응을 조사하여 시정하고, 백혈병 피해자에 대한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씨 아버지는 다시 길거리에 나선다. 14일 오전 구미시 케이엠텍 회사 앞에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억울한 아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이에 앞서 기자에게 수화기 너머로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아이가) 지난달에 골수이식 수술을 받고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어요. 여전히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고, 국물 위주로 2끼 정도로 간신히 (건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감염 우려 때문에 외부인 뿐 아니라 가족인 우리도 접촉이 쉽지 않아요. 오로지 일과 공부 밖에 모르던 스무 살 건강한 청년이 갑자기 백혈병이 걸렸는데, 회사와 학교 등은 그냥 방치해 버렸잖아요.
2024년 우리나라 현실이라는 믿기지 않지만, 이제라도 진솔한 사과를 듣고 싶습니다. 아이 치료 뿐 아니라 해고 등도 철회해 주시고, 다시는 이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방지대책을 세워달라는 것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