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결국 10번째 거부권을 행사했다. 윤 대통령은 21일 '순직 해병 수사 방해 및 사건 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채 상병 특검법)'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 2일 채 상병 특검법이 재석 의원 168명 전원 찬성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 19일 만이다.
이날 오후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밝혔다. 앞서 이날 오전 한덕수 국무총리는 국무회의를 열어 재의요구안을 심의·의결했다. 정 실장은 채 상병 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한 이유로 네 가지를 들었다.
① 행정부 권한을 부여받는 특검 제도는 여야가 합의할 때만 가능하다
② 야당의 특별검사 후보자 추천 독점은 공정성·중립성이 없고 헌법에 위배된다
③ 특검 제도는 수사가 공정성·객관성이 의심되거나 미진한 경우에 한해야 한다
④ 특검법의 대국민 보고 규정은 피의사실 공표를 허용해 악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이선균 방지법'으로 피의사실 공표 금지를 약속한 민주당의 자기모순이다
정 실장이 내놓은 네 가지 주장이 사실인지 살펴봤다.
[첫째] 특검은 여야 합의할 때만 가능? 과거 사례 보니
먼저 특검 제도가 여야 합의시에만 가능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정 실장은 "국회는 지난 25년간 13회에 걸친 특검법들을 모두 예외 없이 여야 합의에 따라 처리해 왔다"라고 했다.
하지만 지난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은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의원들이 특검 법안 처리를 강행해 재석 의원 162명 중 찬성 158명 반대 1명 기권 3명으로 통과시킨 바 있다. 2007년의 'BBK 특검법' 또한 한나라당 의원들이 불참해 재석 160명 가운데 찬성 160명의 만장일치로 가결됐다. 2012년 '내곡동 특검법'도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이 반대한 가운데 통과됐다.
이러한 과거 특검법 통과 당시를 살펴보면 지난 2일 채 상병 특검법이 본회의에서 통과할 때 김웅 의원을 제외한 국민의힘 의원들이 불참하고 나머지 재석 의원 전원이 법안에 찬성한 것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특검 제도가 여야가 합의할 때만 가능하다는 정 실장의 주장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둘째] 야당의 특검 후보 추천권 독점은 헌법 위배? 헌재 판단은...
둘째, 야당이 특별검사 후보자 추천권을 독점해 공정성과 중립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헌법에 위배된다는 주장 또한 사실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과거 2012년 '내곡동 사저 특검법', 2016년 '박근혜-최순실 특검법', 2018년 '드루킹 여론조작 특검법' 등은 모두 당시 여당을 제외한 야당에서 특별검사 후보자를 추천했다.
게다가 지난 2019년 헌법재판소는 최서원(개명 전 이름 최순실)씨가 '박근혜-최순실 특검법'의 제3조 2항이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에 대해 해당 조항이 합헌이라고 판결내렸다. 해당 조항은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특별검사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규정했다.
헌재는 "특검 후보자의 추천권을 누구에게 부여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특검을 임명할 것인지에 관한 사항은 국회가 입법재량에 따라 결정할 사항이다. 당시 여당은 수사대상이 될 수도 있는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라면서 "여당이 특검 후보자를 추천함으로써 추천권자와 이해관계를 같이 할 대상을 수사하고 기소하는 이해충돌 상황이 야기되면 특검제도의 도입 목적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 하에 여당을 추천권자에서 배제한 것을 두고 합리성과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특검 대상 사건의 내용이 달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헌재가 특검 임명에 '국회가 입법재량에 따라 결정할 사항'이라고 언급한 것은 시사 점이 있다. 더구나 채 상병 특검의 경우 대통령실의 '수사 외압'에 대한 의혹 등을 다루고 있기에, 윤 대통령이 소속된 국민의힘을 특검 후보자 추천권에서 배제한 것은 합리성과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셋째] 특검은 국회가 중립성·공정성 판단해 의결한 사건이면 충분
특검 제도는 수사가 미진하거나 수사의 공정성·객관성이 의심되는 경우에 한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다소 어폐가 있다.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특별검사의 수사대상은 "국회가 정치적 중립성과 공정성 등을 이유로 특별검사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본회의에서 의결한 사건" 혹은 "법무부 장관이 이해관계 충돌이나 공정성 등을 이유로 특별검사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사건"이라고 규정돼 있다.
제안 이유로 "순직 사고의 수사를 방해하고 사건을 은폐하는 행위에 있어 대통령실 관계자와 국방부 장·차관이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국민은 군 검찰단이 독립적으로 엄정한 수사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 채 상병 특검법은 이미 본회의에서 의결된 만큼, 특검법에 전혀 위배되는 사안이 아니라는 얘기다.
[넷째] 글자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은 대국민 보고 규정... 자기모순의 극치
마지막으로 채 상병 특검법의 대국민 보고 규정이 문제이며 민주당의 자기모순이라는 주장 자체도 자기모순이다. 박근혜-최순실 특검법 제12조는 특별검사 또는 특별검사의 명을 받은 특별검사보가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을 위해 피의사실 외의 수사과정에 대하여 언론브리핑을 실시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당시 특검팀의 수사팀장이 바로 윤 대통령이다.
이번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채 상병 특검법의 제12조 또한 박근혜-최순실 특검법 제12조와 완전히 동일하게 대국민 보고를 규정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특검의 수사팀장으로서 지휘한 대국민 보고는 괜찮고 채 상병 특검법의 대국민 보고는 문제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