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어색함'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대화를 하거나 논 기억이 거의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평일에 아버지를 볼 기회는 없었다. 아버지는 늦은 저녁 잠자리에 들고서도 한참 지난 뒤 귀가했다. 맨정신은 드물었다. 아버지는 취한 상태로 주로 집에 들어왔다. 주말에도 나갈 때가 많았다.
요령이 없던 아버지
방학이 되면 가족이 다 함께 여행을 떠났다. 큰아버지네(아버지의 큰 형네)에 가거나 외가에 가거나 또는 서울에 갔다. 항상 아버지는 없었다. 아버지는 여행비를 듬뿍 쥐어준 뒤 계속 일했다(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때 이미 한강유람선, 63빌딩, 아이맥스영화관, 용인자연농원(지금은 에버랜드), 이태원 등을 모두 구경했다.
아버지와 평생 목욕탕 간 건 손꼽을 정도다. 외식을 했지만 자주 있는 행사는 아니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있을 때면 어색했다.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랑, 여동생이랑 이야기를 잘 하다가도 아버지가 나타나면 이상하리만큼 조용해졌다. 아버지는 서운했을 것이다.
그건 싫은 감정이라기보다는 어색하다고 하는 게 맞았다. 우선 어머니가 조용해졌고 덩달아 동생과 나도 조용해졌다. 침묵이 싫어서, 어색함이 싫어서 아버지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오히려 더 어색해질 뿐이었다.
아버지 또한 몇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단답형으로 끝날 뿐이었다. 아버지가 던지는 질문이란 사실 길게 말하기 힘든 유형이었다. 예를 들면 "이번에 시험 잘 쳤나?" "학교 잘 다니나?" "선생님 말씀 잘 듣나?"와 같은 것들이었다.
대학 시험을 100일 앞두고서였다. 그날 아버지가 일찍 들어오셨다. 10시경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비닐 봉지 하나를 '툭' 던지고 들어가셨다. 어머니와 나는 두리번거리다 비닐 봉지를 열었다. 맥주 2캔이 들어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의미를 해독하지 못했다. 그 다음날 어머니가 여기저기서 수소문한 뒤 나름 해독한 결과를 전해왔다.
"대학시험 100일 앞두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술 한 잔 권하면서 힘내라고 하는 게 있나 보더라. 아버지가 어디서 그걸 들었는갑제. 에구, 그랬으면 같이 자리에 앉아서 덕담이라도 한 마디 해주고 술도 따라주고 그래야지. '툭' 던지고 가면 어쩌란 말이고. 참말로."
아버지는 요령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이 확정되자 이번엔 엄청 두툼한 뭔가를 하나 '툭' 던졌다. 풀어헤쳐 보니 통악어가죽코트였다. 아마 '최고급옷'이라고 샀을 테지만 입고 다니기엔 너무 부담스런 옷이었다.
어머니가 권해서 몇 번 학교에 입고 갔더니 '우와', '우와' 하는 눈총에 몸 가누기가 힘들었다. 아마 한 주도 안 입고 옷장에 그대로 들어갔을 테고, 아버지는 가끔씩 "왜 안 입노"라면서 불만 섞인 말을 던지며 사라졌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그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졌다. 20대 초반 때였다. 명절이라 아버지가 태어난 섬 마을에 먼 친척까지 다 모였다. 어른들끼리 '왁자지껄'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어머니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버지 술 한 잔 따라 주고 오라고.
아버지와 아들이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한 번도 안해봤으니 어찌해야 할지 가늠이 안됐지만 옆에 가서 "한 잔 받으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아버지 반응은 의외였다. "어린 놈이 어디 여기 와서..."였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도 그 상황이 어색해서 그랬던 것으로 이해한다.
이제 나는 50대, 아버지는 80대다. 서로 만나면 길게 대화를 나누기 힘들다. 매사에 그런 건 아니다. 아내가 그 대목을 찾아냈다. 어버이날을 맞아 부산에서 큰아버지네 식구들과 식사 자리를 맞아 이동 중이었다. 대략 1시간 가량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사는 예천 인구를 물었고, 그쯤 되는 도시들 목록을 읊었다. 뒤이어 아버지가 놓친 도시들 목록을 내가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모임 장소를 물었다. 부산시 기장군이라 하니 기장군에서 유명한 것들을 아버지가 '줄줄줄' 읊었다. 빠진 게 있거나 연관된 정보들을 내가 이어받았다. 아내는 그 풍경이 신기했나 보다. "아버지랑 자기랑 되게 잘 맞아. 이야기 되게 잘 되는 것 알아?" 나는 부인했지만 꽤 긴 시간 대화한 건 사실이다.
아버지는 깔끔한 성격이다. 밖에서 집에 들어올 땐 온 몸을 '탈탈탈' 한참을 털고서 들어온다. 복도에서 '탈탈탈' 소리가 들리면 아버지가 문앞에 이르렀단 신호다. 주말에도 7시 이전에 일어나서 온 창문을 열었다.
필기구, 약통, 옷 등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은 군대 내무반처럼 일렬횡대다. 냉장고 안도 마찬가지. 주방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지금까지 본 모든 주방 중에서 가장 깨끗하다"고 평가했다. 냉장고를 열어본 친척들도 마찬가지 평가를 했다. 정리하는 걸 좋아하는 습관은 아무래도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고 봐야겠다.
여행 팸플릿이나 지도 모으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버지 영향이 있지 않나 싶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집엔 '김찬삼의 세계여행기'가 있었다(지금도 보관 중이다). 아버지가 산 책이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전국을 많이 돌아다녔지만 어쩌면 세계여행에 대한 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물어보진 않았다).
어쨌든 어색하기만 한 부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생겼다. 나에겐 아들과 딸이 생겼고, 아버지에겐 손자 손녀가 생겼다.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간 나이 차이는 70세 이상.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세상에 태어났고, 손자 손녀는 태어난 지 몇 년 되지 않는다. 세대 차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의 나이 차이다. '어색함 100퍼센트'로 똘똘 뭉친 아버지가 손자 손녀를 어찌 대할지 오리무중이었다.
대면 첫날 붙임성 좋은 아들과 딸이 쭈뼛쭈뼛하다. 아들은 설정이고, 딸은 오빠 따라 하는 거다.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에게 계속 먹을 것을 권한다. "과자 먹을래?" "과일 먹을래?" 아버지는 거의 래퍼 수준으로 먹을 것을 계속 권했다. 처음엔 아이들 성에 차는 것들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편견이었을지도
다음에 찾아가자 아이들 수준에 맞는 귀여운 베개 세트가 준비됐다. 아이들이 "우와, 이거 내 꺼"라고 하면서 베개를 끌어안는 걸 보니 할아버지 선물은 성공이다. 다음에 찾아가자 딸이 좋아하는 '시크릿주주' 그릇과 수저 세트가 '짠' 하고 나타났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우유와 요쿠르트와 더불어 몇 가지 과자가 있었다. 아이들 쭈뼛거림은 사라진 지 오래. 산책을 할 때 보니 어느새 왼손은 손자, 오른손은 손녀 몫이었다.
얼마 전 방문했을 때다. 집에 들어와서 손을 씻은 아이들이 할아버지 방에 들어간다. 살그머니 살펴보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다. 아들에게 "누가 틀었어?"라고 물어보니 할아버지가 틀었단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신기했다. 아버지에게 "아이들이 이 프로그램 좋아하는 것 어찌 알았어요?" 물었더니 "아이들이 좋아하대"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말하는 요령이 있질 않으니 이 이상 되는 답변을 듣긴 어려울 듯 싶다.
아버지는 잘 웃지 않는다. 하루 종일 웃는 모습을 못 본 경우가 많았다. 손자 손녀가 생긴 이후 돌변했다. 수시로 웃는다. 아버지가 저렇게 잘 웃었나 의아할 정도다. 아이들도 덩달아 웃는다. 아버지가 어떤 기술을 써나 싶어 눈여겨봐도 특별한 건 없다.
문 밖으로 살짝 귀를 대어봐도 너무나 단순한 대화들이다. 아버지는 아이들 보고 계속 "먹어라" "이거 먹을래?" "저거 먹을래?"라고 하고, 아이들 좋아하는 TV 틀어놓고 같이 누워있을 뿐이다. 자연 다큐를 같이 보기도 한다(원래 아버지는 자연다큐 마니아다).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은 병이 된다고 들었다. 아버지에게 모임에 대해서 물었다. 고정으로 참가하는 게 4개란다. 세상에, 나보다 훨씬 많다. 1주일에 평균 모임이 2개 이상이다. 술 마시는 모임, 밥 먹는 모임, 놀러다니는 모임, 봉사하는 모임 등 성격도 다양하다.
최근엔 모임 하나를 새로 가입했단다. 연회비가 1만 원이란다. 정부 지원금이 많아 프로그램이 다양하단다. 대신 연회비가 많아 부담스런 모임 하나는 없앨 예정이란다. 사회 생활을 너무 잘 하는 아버지다. 요령이 없다고 느낀 건 가족에 한해서일 뿐 사회생활 요령은 그 누구보다 잘하는 아버지다. 요령이 없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나의 편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홀로 어머니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건 어머니 유언이었다. 자식들이 고생하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한 유언이다. 아버지에게 왜 굳이 제사를 지내는지 물었다. 본인 마음이 편해서란다. 너희와는 아무 상관 없고, 너희들은 신경 안 써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더했다.
"나도 이제 한 5년 정도 남았다. 내가 죽으면 어머니랑 나랑 너희 편한 데 뿌려라. 그리고 너희들은 제사 같은 건 지내지 마라."
그 이야기를 나눈 뒤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올 준비를 할 때다. 아버지가 손녀에게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랑 같이 살래?" 손녀는 "오옹"이라고 답했다. 아버지는 크게 웃었다. 'YES'라고 생각해서 크게 웃은 것인지 '오옹'이라고 하는 말투가 재미있어서인지, 이렇게 대화하는 자체가 즐거워서인지 잘 모르겠다. 셋 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새롭게 나타난 손자와 손녀. 나의 아들과 딸. 이 녀석들은 내 인생을 바꾸고 있지만 어쩌면 나와 아버지의 관계도 조금씩 바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