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시 전에 집에 가서 밥 먹었으면 좋겠어요."
조귀제(60)는 매일 오전 5시 30분이면 일어난다. 30년 동안 매일같이 지킨 기상시간이다. 오전 6시 50분이면 집을 나선다. 밤 11시 즈음 집에 도착한다. 사는 곳과 일하는 곳의 거리가 멀기도 하지만 일이 많아서다. 저녁 식사는 늘 밖에서 하기 때문에 11시 전에 일이 끝나고 집에 가서 밥을 먹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조귀제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의 대학에 입학했다. 어렸을 때 꿈은 교사였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은 고등학교만 마치고 공무원이 되었으면 했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할 자식들이 다섯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조귀제 위로는 언니와 오빠가 있다. 하지만 대학교에 가지 못했다. 조귀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바로 위 언니가 결혼을 했다. 형부는 서울 사람이다. 형부는 공부 잘하는 처제를 알아보고 대학교에 가기를 바랐다. 입학원서도 형부가 알아서 썼다. 다행히 한 번에 합격했다.
"83년도에 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저희 집안에서는 학생운동을 하거나 노동운동을 한 사람은 없어요. 그때만 해도 민주화운동이 엄청 활발한 시기였죠. 학교에 5.18 광주 항쟁 대자보가 붙었어요. 5.18 사진을 그때 처음 봤어요. 정말 놀랐어요. 충격이 컸죠. 5.18 광주 항쟁을 알기 전에는 도시락 싸들고 학교만 왔다 갔다 했어요. 공부만 하는 것이 세상살이의 전부가 아니란 걸 깨달았죠. 그때부터 세상을 바꾸는 삶에 대해서 고민했어요."
구로공단 노동자로 살다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기로 마음먹은 조귀제는 졸업도 하지 않은 채, 1987년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을 한다. 당시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던 시기다. 조귀제가 입사한 중원전자에서도 파업을 했다. 그때 외친 구호는 "빨간 날은 우리도 쉬게 해 줘!", "화장실 갈 때는 허락 안 받고 갈 수 있게 해 줘!"였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파업을 했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기로 했다. 노조 설립 서류를 갖고 있던 간부들이 회사 봉고차에 납치되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조귀제와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은 조직 활동을 시작했고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날, 드디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회사가 만들어진 후, 저희가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만든 거예요. 전축 만드는 자제를 주문 생산하는 OEM 회사였어요. 전체 직원은 600명 정도 됐어요. 조합원은 제일 많았을 때가 490명까지 됐었죠. 91년까지는 공장이 잘 돌아갔어요. 그런데 구로 공단이 90년대에 들어서 산업 합리화(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생산성의 상승에 의하여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의 증대를 꾀하는 일) 되고 공단 자체가 없어지기 시작해요. 결국 우리 회사도 92년도에 부도가 났어요. 그리고 고용안정투쟁을 3년 정도 하다가 마무리했어요. 노조도 정리했고요. 그런데 저희는 회사가 문을 닫아 집단해고된 거니까 국회와 노동청 앞에 가서 고용안정을 보장하라면서 싸웠어요."
조귀제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 8년 동안 구로 공단 노동자로 살았다. 중원전자 노동조합 선전부장과 사무국장을 맡았다. 위장 취업한 것이 들통나서 구속이 되기도 했다. 구속 이유에는 국가보안법 위반도 있었다. <노동자의 철학>이라는 책을 봤다는 것이 이유였다. 집회에 참여했다고 집시법 위반을 적용했고,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했다고 제3자 개입금지 법을 적용했고, 회사 들어갈 때 신분증을 위조했다고 공사문서 위조법을 적용했다.
조귀제가 위와 같은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날, 조합원들은 버스를 꽉 채워서 방청을 하러 왔다. '조귀제는 위장취업을 했지만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서 탄원서를 제출하고 감옥 밖에서 같이 싸웠다. 그 덕분에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회사는 본명으로 재취업하면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조귀제는 고용이 승계되었다. 당시 노동조합의 힘이 그만큼 셌다는 방증이다.
"노조가 없었다면 고용승계도 힘들었을 거예요. 처음에 현장에 갔을 때, 석 달을 버티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어요. 학생운동 할 때는 피의 맹세까지 하면서 이 세상을 바꾸자고 한 친구들이 구로공단에 취업하고 한 달을 못 버티고 보따리 싸서 나갔어요. 현장이 그만큼 힘들었어요. 매일 납땜을 했거든요. 마스크도 안 쓰고."
조귀제는 자신을 성장 시킨 계기는 그때였다고 한다. 고생은 했어도 '잘 선택한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운동을 하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감옥에 간 조귀제를 본 언니는 말한다.
"네가 그때 서울에 안 가고 진주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나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내성적이고 차분했던 조귀제가 학생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한 사람은 식구들 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들도 그랬다. 동창회 한다는 연락을 받아도 세상 바꾸는 일 하느라 바빠서 못 간다고 하면 어느 정도 통했다. 그래도 한 번은 안 갈 수 없어서 갔다. 삼십 년이 넘게 흘렀어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금세 얼굴을 알아본다.
"제가 겉으로 보기에는 남의 말 잘 들어주고 다정다감한 것 같지만 속은 무척 냉정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별명이 '년꽃다발'이에요. 미친년 꽃다발의 줄임말이죠. 학생운동 할 때 친구가 지어줬어요. 무언가에 한번 꽂히면 정신없이 빠져들고 다른 건 안 본대요. 그리고 시베리아 벌판에 내놔도 죽지 않고 살아날 거래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라고도 하고요(웃음)."
주변 사람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치유활동 시작
현재 민주노총 경기본부 부본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귀제는 2014년부터 치유활동을 시작했다. 치유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1997년, IMF 시기에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해고 되었을 때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당시에 조귀제와 가까이 지내던 두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한분은 조귀제에게 늘 행복한 얼굴로 "형수님"이라고 불렀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욱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사회를 바꾸자 하고 공동체를 만들자고 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마음의 병이 있는지 모를 수가 있어요. 제 자신이 용납되지 않았어요. 장기 투쟁 사업장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싸우면서 마음이 다 망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임금 인상 요구하고 무슨 무슨 교육하잖아요. 그게 다가 아니에요. 공동체는 각자 가지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 녹여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해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걸 상기시키는 것, 그게 공동체가 할 일이죠. 집단으로든 개별적으로든 만나서 이야기해야 하고. 무엇이 힘들다고 구체적으로 말 못 해도 그 사람의 눈빛, 태도를 보면 저 사람이 무슨 고민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럴 때 말 걸어 주고 손 한 번만 잡아줘도 금세 표정이 바뀌어요."
치유활동은 국내 활동가들로만 하지 않는다. 2020년부터는 수원의 이주민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는 이주노동자들도 만난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미얀마 사람들은 미얀마 정부에 군부가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미얀마인들은 주말이면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집회를 연다. 치유 상담가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공감하면서 그 집회에 참석한다. 함께 피켓을 들고 집회에 참석하고, 집회가 끝나면 이주민센터에 가서 그분들이 좋아하는 수박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한 달 정도 집회에 참석했더니 이제는 안 와도 된다고, 자기네들끼리 해도 된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연대 활동이 치유 활동이 된 셈이다.
조귀제는 결혼 후에도 노조활동을 이어갔다. 노조활동도 출·퇴근 시간이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어떻게 활동이 가능했는지를 물었다.
"시어머니와 같이 살았어요. 27년 동안 어머니가 아이 둘을 다 보살펴주셨어요. 2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고생 많이 하셨죠. 노조활동 하느라고 집안일을 소홀히 했지만 어머님이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시집살이 안 시키셨고, 설거지할 거 있으면 남편 보고 하라고 했어요. 아침에 출근할 때는 항상 '조심해서 다녀와라'고 하시고(눈물). 식구들이 다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아침 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매일 아침 5시 반이면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했어요. 어머님께 해드릴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으니까요."
시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좋은 의미로 눈물을 흘리는 며느리가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복이다. 그렇게 며느리를 아끼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슬픔과 다를게 무언가. 시어머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눈물을 보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퇴직하면 여유가 있을 테니 그때 잘해드리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어머님은 기다려 주시지 않고 떠나셨다.
2021년에 경기도가 위탁한 마을공동체사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집단해고를 당했다. 이재명 도시자가 들어오면서 위탁 업체가 바뀌었는데 고용승계가 안 된 것이다. 경기도청 앞에서 천막을 치고 해고 노동자와 함께 싸웠다. 민주당은 그렇다 치고 정의당마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선거가 다가오자 노동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활동가가 의회에 들어가 들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조귀제는 2022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정의당 경기도의원 비례대표로 출마를 결심한다.
"노동정치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출마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정당 득표율 5% 얻어야 당선 하는데 3.6% 밖에 못 얻었어요. 많이 속상했어요. 진보정당이 노동현장과 멀어지는 것을 방치했다는 자책감이 컸어요."
노조활동가의 '은퇴 이후'는?
단 한순간도 그냥 보내지 않은 조귀제는 정년퇴직을 2년 앞두고 있다. 많은 노조 활동가들이 퇴직하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는다. 아는 건 노동조합밖에 없어 막막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본인도 다르지 않을 거라는 마음에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이 되었다.
"퇴직했다고 멍하니 하늘만 보고 들과 산에서 놀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노인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회보장 영역이 너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3시간 일 시키고 1시간 임금만 줘도 일자리를 주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어요. '나는 그만큼만 받아도 돼'라면서 스스로를 억누르고 사는 거죠. 그런 문화가 정치 사회적으로 다 녹아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다양한 노인 운동이 필요해요.
이음나눔유니온의 조합원은 퇴직해서도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공동체를 만들고 커뮤니티를 하고 있어요. 각자가 속한 자신의 공동체에서 이음나눔유니온이 필요한 것을 만들면 돼요. 현재 200명 밖에 안 되는 조합원이 집회하고 싸운다고 금방 바뀌지는 않잖아요. 조합원이 더 늘어야겠죠. 꼭 싸워야 할 문제가 있으면 조합 활동가가 성명서 내고, 시위를 해야 한다면 광화문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고 봐요. 노인 승차가 문제면 자기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자기가 편한 시간에 1인 시위하고 인증샷 올리고.
1년에 한번 총회 할 때는 전국에 조합원들이 있으니까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모였으면 해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사는 이야기도 나누고 행복한 노후 대책을 도모하는 것도 좋지요. 등산을 해도 좋고, 1박 2일로 캠핑을 해도 좋고요. 전형적인 총회 형식은 지루하잖아요(웃음)."
바쁘게 살다가 퇴직해서 여유롭게 보내고 싶은 사람도 많을 텐데 정기적으로 모이는 일은 부담스럽기도 할 테다. 조귀제의 말대로 문제가 생기면 각자가 사는 곳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대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국에 있는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이 전국적으로 들고일어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퇴직 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저는 자료 모으고 기록하는 것을 좋아해요. 구로공단 중원전자 시절부터 모은 노보(노동조합신문), 집회 나가서 받아온 유인물, 배지, 조끼, 투쟁복 등을 우리 집 장롱에 가득 채울 정도로 모았어요. 문경에 '신길수 추모사업회'가 있어요. 그곳에 다 기증했어요. 1톤 트럭으로 꽉 채워서 갖고 갔죠. 기회가 되면 '노동역사박물관'을 만들어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고 싶어요.(웃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음나눔유니온 홈페이지(enunion.org)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