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주의 이념에 깊게 뿌리내린 건전재정 기조를 폐기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건전재정의 근간인 "긴축을 통한 민생경기 부양"은 양립할 수 없는,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정책 목표다. "부자 뺀 건전재정"이 민생 대란 사태에 2차 충격을 가하면 경제가 성장해도 실질소득이 오히려 감소하는 구조적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2년 연속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초유의 사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민생 곳간을 털어 부자 감세 공백을 메우는 사이, 민생경제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더욱이, 무능한 재정운영과 사상 최악의 세수 펑크 참사로 민생 확대 재정을 추진할 여력도 소진된 상태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건전재정의 이념 편향을 바로 잡고 지속 가능한 균형재정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야만 실질소득 감소가 내수 불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 고리를 차단할 수 있다. 양반 대접을 받는 법인세 감세와 비교하면, 근로소득세는 감세는커녕 증세 부담을 짊어진 머슴 정도로 취급받는다. 유리 지갑인 근로소득세가 물가조차 반영하지 못하는 불합리한 제도만 개선해도 건전재정의 기업 편향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바로 '소득세 물가연동제'를 입법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민주당도 정책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아무리 부자 감세를 비판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실질소득 계속 마이너스
국정 기조의 한 축인 건전재정은 시작부터 잘못 설계된 정책 실패이며, 이에 대한 평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건전재정의 친기업 편향이 무질서한 재정운영과 얽히고설키면서 나라살림이 더 불건전해졌기 때문이다. 법인세 보편 감세로 관련 세수는 2022년 104조 원에서 2023년 80조 원으로 무려 24조 원이나 감소했다. 민주당이 제안한 25만 원의 '민생회복지원금'을 두 번 지급할 수 있는 돈이 사라진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재정적자의 질적 저하가 만성적 소득충격으로 전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로, 건전재정의 양대 축인 "기업 확장재정·민생 긴축재정" 기조가 기승을 부리면, 민생 곳간을 털어 재정 공백을 메우는 정책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게 된다. 미친 공공요금 인상을 통해 공공적자를 메우는 '공공요금 시장화' 정책도, 경제가 어려울수록 근로소득세 부담이 증가하는 것도 이에 속한다. 근로소득세 세수 추이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부자 뺀 건전재정" 중독에 힘입어 법인세 세수가 24조 원 이상 급감했다. 그러나 근로소득세 세수는 민생 대란 사태에도 불구, 2022년 57조 원에서 2023년 59조 원으로 오히려 2조 원 증가했다. 정부가 건전재정을 강조할수록 실질소득이 감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두 번째 문제는 경제가 성장해도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디커플링 현상이 구조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현 정부 들어 실질소득이 성장률을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이 점점 심각해지다, 최근에는 아예 마이너스 성장 궤도에 진입해 버렸다. 숫자만 놓고 보면, 금융위기에 준하는 소득충격으로 평가할 만하다. 구체적으로, 우리 경제가 2021년에 4.3% 성장했을 때 실질소득은 절반 정도인 2.0% 성장에 그쳤다. 2022년 성장률은 2.6% 수준인데 실질소득은 –0.2% 역성장했다. 2023년에는 실질소득이 –1.1% 역성장해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이 정도 소득충격이면, 민생경제는 사실상 금융위기에 준하는 비상 상황에 직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근로자가 대상인 '실질근로소득'은 더 심각한 상황이다. 실질근로소득은 2023년 이후 급락 추세로 전환했는데, 올해 1분기에는 코로나사태 이후 최대 폭의 하락률을 기록했다. 올해 1분기 성장률이 전분기대비 1.3% 성장했음에도, 실질근로소득은 작년 4분기 –1.9% 이어 올해 1분기에도 –3.9% 역성장했다. 한국은행이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2.5%로 상향했음에도 코로나사태에 준하는 소득충격이 발생한 것이다. 건전재정의 뿌리인 "기업 확장재정·민생 긴축재정"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민생경제는 결코 소득충격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소득충격이 장기화될수록 내수 경제가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는 이유다.
지금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중장기 균형재정의 틀 안에서 "기업 균형재정·민생 확대 재정" 기조를 입법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즉, 민생경제를 위한 근본 대책을 탑재할 수 있는 재정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의미다.
첫째, 민생경제가 정상화될 때까지 공공요금 인상 계획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공공요금 인상으로 2차 물가대란 사태가 발현하면, 천하의 민생대책을 추진한다 해도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둘째, 특단의 소비진작책을 마련해 만성적인 내수불황 국면을 타개해야 한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민생회복지원금'도 먹고사는 문제로 바라보면 경제정책이고, 건전재정의 눈으로 보면 퍼주기 포플리즘이 된다. 지금의 민생경제를 금융위기에 준하는 비상 상황으로 인식하고, 선별이든 보편이든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한다. 셋째, 민생 확대 재정의 틀 안에서 '소득세 물가연동제'를 추진해 경제가 성장해도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경제 어려울수록 세 부담 늘어나
정부가 밀어붙이는 민생정책들은 잘못된 과녁을 겨누고 있다. 2023년 기준, 가구의 소득 구성을 보면, 근로소득(63%)과 사업소득(20.6%)이 전체 소득의 83.6%를 차지하지만, 재산소득 비율은 1% 정도다. 반면, 정부의 주요 정책들은 근로소득과 사업소득 과녁이 아니라, 1%에 불과한 재산소득과 관련된 규제 완화에 편중되어 있다. 개인투자자를 위해 금투세, 주식양도세, 상속세를 과감하게 폐지하거나 완화하고, 다주택자 중과 폐지 등 부동산 규제 완화가 대부분이다. 가계소득의 84%를 차지하는 근로소득과 사업소득 제고를 위한 소득증진책이나 소비진작책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작금의 민생 대란 사태를 해소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은 실질소득을 늘려 소비 여력을 제고하는 길뿐이다. 민생 확대 재정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정책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정부가 재정 투입을 통해 소비 여력을 높이는 내수진작책인데, 민주당이 제안한 "민생회복지원금"이 여기에 속한다. 두 번째는 근로소득세 세법 개정을 통해 세수 부담을 완화해 가처분소득을 늘리는 방안이다. 불합리한 근로소득세 체제를 현실화해 법인세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자는 것이다. "소득세 물가연동제" 이슈가 여기에 속한다.
근로소득세를 둘러싼 쟁점은 법인세처럼 세율 인하를 통해 세 부담을 완화하는 것도 아니다. 세율은 그대로 적용하되, 물가도 반영하지 못하는 불합리한 세율구간을 정상화해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부작용을 해소하자는 것이다. 현행 근로소득세 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소득세율 구간이 물가를 반영하지 못해 세율을 올리지 않아도 세금이 늘어나는 자연 증세가 일어나는 구조라는 점이다. 즉, 물가 상승으로 실질소득은 그대로인데, 명목소득이 늘어 더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다면, 근로소득세가 왜 기울어진 운동장인지를 살펴보자. 최근 10년('13년~'23년)간 법인세와 근로소득세 증가 추이를 비교하면 더욱 명확해진다. 이 기간에 법인세는 2013년 44조 원에서 2023년 80조 원으로 83%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근로소득세는 22조 원에서 59조 원으로 169% 증가했다. 굳이 복잡하게 분석하지 않아도, 근로소득세의 증가 속도가 법인세보다 2배 이상 빠르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가장 큰 원인은 화석화된 근로소득세 세율구간이 물가 상승을 반영하지 못해 실질소득이 그대로임에도 세수 부담이 늘어나는 자연 증세가 발생하는 데 있다. 물론, 물가와 연동한 소득세법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한다. 당연히, 미국, 캐나다 등 대부분의 선진국도 방식은 달라도 물가와 연동한 세율체계를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소득세 물가연동제'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소득 보전 대책인 동시에 민생 물가 대란을 완화할 물가 대책으로 인식해야 한다. 정부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정부 재정 투입을 통한 소득 보전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법인세 감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물가도 반영하지 못하는 불합리한 소득세법을 정상화해 경제가 어려울수록 세 부담이 늘어나는 구조적 폐단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민주당의 대응도 문제가 있다. 정부와 여당이 건전재정 중독에 빠져 민생 확대 재정을 외면하고 있는데도, 민주당은 부자 감세를 비판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건전재정의 기업 편향을 막아낼 근본 대책을 제시하고 이를 입법으로 정면 돌파하는 전문 역량을 보여야 한다. 민주당이 대안 있는 경제 정당으로 거듭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아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