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사는 곳 인근 국립대전현충원에는 걷기 좋은 둘레길이 있어 산책 겸 휴식을 위해 자주 찾곤 합니다. 현충원 외곽을 따라 크게 도는 '보훈둘레길'은 '대전의 걷고 싶은 길 12선'에 뽑힐 정도로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트레킹 코스이기도 합니다. 또 잘 보존된 현충원의 자연환경 속에 보훈이라는 정신적 의미를 담고 있어 교육의 장소로도 이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지만 현충원에 갈 때마다 탐탁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묘비마다 앞에 꽂아놓은 수많은 플라스틱 조화입니다. 묘역이 온통 울긋불긋한 색으로 뒤덮여 있어 얼핏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사실 환경문제가 이만저만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 뚜렷하지만... 이해관계 복잡해 해결 쉽지 않아
한국소비자원이 지난 2022년 4월에 발표한 '조화 안전실태조사'에 따르면 "시중에 유통·판매 중인 조화 20개 제품을 대상으로 잔류성유기오염물질(POPs)을 시험한 결과 일부 조화 제품에서 단쇄염화파라핀이 최대 기준치의 71배가 검출됐다고 합니다.
단쇄염화파라핀, 다이옥신 등 잔류성유기오염물질은 자연 분해되지 않고 동식물 체내에 축적돼 생태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유해물질로 스톡홀름협약을 통해 세계적으로 저감·근절을 추진하는 물질입니다.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발생한 플라스틱 폐 조화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 449톤에 달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를 처리하는 예산만 해도 1억4200만 원이 소요됐다고 합니다. 폐 조화는 재활용이 어렵고 대부분 사용 후 소각·매립되는데, 환경 내에 오랫동안 축적된다고 하니 자원낭비와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해결돼야 할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개선책은 없습니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추모의 감정을 꽃으로 대신하려는 유가족의 심정을 규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화에 비해 보존기간이 길고 가격도 저렴하기 때문에 생화로 하자고 할 수도 없습니다. 생화는 하루 이틀만 지나면 시들어버리고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몇 년 전 미국 알링턴국립묘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워싱턴D.C.에서 포토맥 강을 건너면 있는 그 넓은 국립묘지의 수많은 묘비 앞에 꽃 한 송이조차 볼 수 없었습니다. 생화든 조화든 꽃을 꽂아두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묘 앞에 이렇게 플라스틱 조화를 꽂아 추모하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국립대전현충원도 이런저런 지적 때문에 고민이 많은 모양입니다. 묘역에 있는 플라스틱 화병을 돌 화병으로 교체하면서 입구를 좁게 만들었습니다. 조화의 양을 줄여보려는 것이지요. 향후 국립묘지의 특성을 고려해 나라꽃인 '무궁화'(조화)로 단일화하는 것을 적극 추진할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과연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대전에 있는 환경단체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획기적인 개선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전환경교육센터 고은아 이사장은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꽃 제조·유통·판매업자, 현충원 등 이해 관계자가 많아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라며 리빙랩 방식으로 해결방안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묘역에 꽃·나무 심어 관리
이렇게 장황하게 국립대전현충원 플라스틱 조화의 문제점을 얘기하는 것은 얼마 전 부산에 있는 UN기념공원을 방문했는데, 눈여겨 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UN기념공원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유엔군 전몰장병들이 안장된 묘지입니다.
각 국가별 묘역에는 사각형의 평장 묘비석이 있는데요, 현충원처럼 조화가 꽂혀 있는 모습은 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 묘비석 사이에는 장미와 회양목이 심어져 있습니다. 회양목은 보기 좋게 네모 반듯하게 잘 정리돼 있었습니다. 입석 묘비가 있는 한국군 묘역의 묘비와 묘비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UN기념공원 측은 "묘역에 조성된 꽃과 나무는 장미와 연산홍으로 조경사의 가지치기, 꽃 따기, 방제 작업, 관수 등의 여러 조경작업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도 이렇게 조성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플라스틱 조화보다는 살아있는, 그리고 잘 관리만 하면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는 꽃나무가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묘비 앞에 무궁화 조화를 꽂겠다는 현충원의 입장에서 진일보해 살아있는 무궁화를 심으면 금상첨화겠네요.
유족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등 이해 관계자가 많다고요? 또 나무를 구입하는 비용이나 이를 관리하는 비용이 걱정된다고요? 그렇다면 일단 유족이 없는 무연고 묘지부터 시범적으로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추후 유족들의 신청을 받아 점차 늘려나가는 방법을 강구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한꺼번에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 같고요, 또 조화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판매하는 업자들에게도 당장 큰 타격이 가지는 않을 것 같네요. 비용도 지금의 폐 조화 처리비용과 화병 교체비용을 따져보면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언제까지 국립대전현충원이 호국영령들의 안식처가 아니라 플라스틱 조화의 무덤이 돼야 할까요. 플라스틱 꽃으로 추모하는 문화,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가오는 현충일을 계기로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