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놀고 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딱지(플라스틱)치기도 한다. 흙을 갖고 노는 아이도 보인다. 나무 둥치를 타고 오르다가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연둣빛 웃음을 지어 보인다.
문득, 초등학교 다닐 때가 떠올랐다. 독후감 발표회를 여기에서 했다. 나무 그늘 아래로 전교생을 다 들이고도 남았다. 운동회 날이면 장기자랑 무대였다. 졸업앨범 사진도 나무를 배경으로 찍었다(짐작하겠지만 이곳은 나의 고향이기도 하다).
중학생 때도 매한가지였다. 사람들 눈을 피해 다른 동네 여학생을 만난 곳도 나무 아래였다. 그날 밤, 나뭇가지 사이로 비친 달빛이 황홀했다. 나무 그늘은 마을 어르신의 쉼터였다. 마을 대소사도 여기에서 이야기됐다. 나무는 사람의 아픈 사연을 다 들어주고, 남몰래 훔친 눈물도 닦아줬다.
'어른 다섯의 아름이 넘는 교정의 느티나무/ 그 그늘 면적은 전교생을 다 들이고도 남는데/ 그 어처구니를 두려워하는 아이는 별로 없다/ 선생들이 그토록 말려도 둥치를 기어올라/ 가지 사이의 까치집을 더듬는 아이/ 매미 잡으러 올라갔다가 수업도 그만 작파하고....'
고재종의 시 '담양 한재초등학교의 느티나무' 앞부분이다.
느티나무는 넉넉한 가지를 사방으로 펼치고 있다. 자태가 늠연하다. 키 30여 미터, 가슴높이 둘레 8미터 가량 된다. 나무 한 그루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한다. 600번도 넘는 봄날을 보낸 셈이다. 생물학적 가치도 높아 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제1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도 받았다.
느티나무와 함께 석불도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후백제 때 만들어진 석불은 땅속에 묻혀 있다가, 마을 주민의 꿈에 나타나 빛을 다시 봤다고 한다. 느티나무와 석불은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과 교직원, 주민 등 많은 사람의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됐다. 지금도 마을과 마을사람의 든든한 뒷배다.
느티나무를 품은 학교의 역사가 깊다. 1920년 대치동공립학교로 문을 열었다. 교실이 불에 탄 한국전쟁 땐 느티나무 아래에서 공부했다. 학교를 넓힐 땐 주민들이 울력으로 흙과 돌을 날랐다. 재학생도 운동장 다지기에 힘을 보탰다. 느티나무 옆에 '개교 1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지금은 전교생 100여 명 남짓 된다. 담양 한재초등학교다.
느티나무와 학교를 품은 마을이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다. 큰 산과 들을 지닌 한밭(大田)이고, 한재(큰재) 아랫마을이라고 대치(大峙)다. 큰산은 병풍산(822m)과 불대산(710m)을 가리킨다. 산봉우리가 병풍을 두른 것 같다고 병풍산, 부처가 앉은 불대(佛臺)를 닮은 산세라고 불대산이다.
대치는 두 개의 산을 배경으로 마을이 자리하고, 앞으로 너른 들이 영산강까지 펼쳐져 있다. 한재초등학교 교가도 '불대산 높은 기상 메아리치고/ 영산강 푸른 물결 굽이치누나/ 보아라 한재벌의 아침햇살을…'로 시작한다.
대치리는 담양읍과 장성읍의 중간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담양-장성을 잇는 24번국도가 마을 가운데로 지난다. 원촌,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신남, 대조 등 8개 마을로 이뤄져 있다. 대전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고, 면소재지다. 경북 영천을 본관으로 한 이씨가 많이 살고 있다.
원촌(院村)은 서원 있던 곳이다. 영천이씨 이석지(1328∼?)와 그의 아들 이안직 등을 기리는 대치서원이 1754년 세워졌다. 남곡(南谷) 이석지는 보문각대제학, 판도판서 등을 지낸 고려후기 문신이다.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킨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이다.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사라지고, 유허비만 남아있다.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는 영천이씨가 터를 잡으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마을을 가로질러 대치천이 흐른다. 동부는 대치리의 중심으로, 한재초등학교와 파출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휴식처이자 공회당 격인 척서정과 효우당이 마을공동체의 상징이다.
척서정(滌署亭)은 더위를 씻는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방이 없다. 17세기에 건립된 뒤 몇 차례 고쳐 지었다. 일반적인 정자와 달리, 마을 복판에 들어서 있다. 누구라도 쉴 수 있는, 모두한테 열린 공간이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도 여기에서 논의됐다. 냇물 흐르는 골목의 담장벽화도 멋스럽다.
척서정 옆에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영천이씨 입향조 이희증이 용인에서 옮겨와 터를 잡고 살면서 심었다고 전한다. 당산나무 옆에 쌍계당(雙溪堂)도 있다. 1821년 지은 영천이씨 문중의 강론장이다. 한말에 불탄 것을 1956년 다시 지었다. 건물에 '쌍계당' '효우당' 편액이 함께 걸려 있다. 효우당은 문종이 내려준 이종검의 당호다. 이종검은 이석지의 손자다.
남부는 '솔밑' '솔미테'로 불렸다. 숲을 이룬 소나무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솔밑은 금남공 정충신과도 엮인다. 정충신이 군사를 이끌고 마을에 왔을 때다. 우거진 소나무 탓에 깃발을 눕혀야 할 판이었다. 군졸이 일부 소나무를 베어내려 하자, 정충신이 '주민의 나무를 함부로 베어선 안 된다'며 말렸다는 얘기다.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정충신은 광주 금남로 도로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솔밑 천변엔 재래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천막극장 펼쳐졌던 천변은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고, 장옥도 현대식으로 바뀌어 옛 모습을 찾긴 어렵다. 칼, 낫, 괭이, 호미 등을 만드는 대장간이 장터의 터줏대감이다. 장은 매 3일과 8일에 열린다.
남부에서 분리된 신남은 행정의 중심지다. 면사무소, 중학교, 우체국, 파출소, 농협, 성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우체국은 1923년,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은 1927년 문을 열었다.
중학교는 1950년 한재고등공민학교로 시작됐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5년 9월 인가를 받아 한재중학교로 개교했다. 중학교 앞에 잠종장도 있었다. 70∼80년대엔 마을에서 누에를 많이 길렀다. 일제강점 땐 마을 남쪽으로 비행장 활주로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민간 우표박물관도 신남에 있다. 대한민국 첫 우표인 문위우표에서부터 헌법공포 기념우표, 한글반포 500주년 기념우표, 서울올림픽 기념우표까지 다 있다. 지금은 사라지다시피 한 손편지의 기억을 더듬으며, '작은 네모, 큰 세상'의 우표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