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시간에 이르자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로비에 흩어진 사람들이 한 군데로 모인다. 모임을 주도한 몇몇은 서로 다른 색의 띠로 말은 종이를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종이를 집어든 이들은 이내 자신이 선택한 색깔에 따라 그룹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챈다. 내가 선택한 색은 빨간색. 소모임을 이끄는 리더의 신호에 따라 한쪽으로 이동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선반 위에 놓인 도구들 중 하나를 선택하세요."
거기엔 한 쪽 눈을 감고 볼 수 있는 '돋보기', 벽과 바닥에 대고 글씨를 자세히 볼 수 있는 '루페', 핸드폰의 렌즈와 연동하여 미세한 것까지 훔쳐 볼 수 있는 '휴대용 현미경', 마지막으로 멀리서 있는 풍경을 줌인으로 당겨볼 수 있는 '쌍안경'이 놓여있다. 조장의 지령에 따라 우리는 하나둘씩 기호에 맞는 도구를 선택한다. 그리고 리더의 수신호를 듣고 극장 속의 곳곳을 탐닉하는 <백스테이지 투어>는 시작된다.
극장의 문을 열고 객석을 지나 무대 위에 오른다. #1.무대에서 객석을 바라보는 뒤편을 지나 분장실에서 쌍안경으로 객석의 너머를 관찰한다. #2. 덧마루가 켜켜이 싸인 물품보관소로 이동한다. 오래된 나무 냄새에 뒤섞여 균들이 득실해 보이는 이곳에서 가져온 도구는 꽤 쓸모있게 움직인다. #3.여러 겹의 원형 계단을 따라 극장에서 가장 높은 천장에 올라 무대 아래를 내려다본다. 극장 관계자가 아니면 절대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을 샅샅이 돌아볼 수 있는 호기를 누린다. #4.투어의 끝무렵, 무대의 중앙에서는 각각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인다. 그들이 제취한 각자의 균을 보다 가까이 관찰할 수 있도록 배양된 샘플이 전시된다. #5.무대에선 원으로 둘러싸인 방석에 앉은채 극장이 내뿜는 균의 감각을 느껴본다. #6.신성한 의식을 마친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신비한 주문과 균으로 배양한 미생물을 맛보며 이들이 준비한 카니발리즘의 제의가 끝을 맺는다.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창작자의 속내-윤혜진 연출가
이번 백스테이지 투어인 <균발견_극장균>은 예술극장의 기후 프로젝트 진행과정 중 윤혜진 연출이 준비한 프로그램이다. 그는 어떤 의도에서 극장의 뒷모습을 낱낱이 파헤치며 균을 관찰하게 됐을까. 이에 관한 호기심은 "기후위기 시대에 극장에서 예술가(창작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거듭하면서 사유의 과정을 담았다.
'기후위기가 내 삶과 예술에 얼마만큼 들어와 있을까?'
'나의 작업은 이대로 괜찮은가?'
'지구의 내일을 위한 오늘의 예술적 상상력은 유효한가?'
연출가는 기후위기에서 촉발된 질문들을 되새기며 자신의 고민을 극장 안에서 풀어내려 했다. 그가 이런 과정을 시도하는 이유는 예술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로서 겪었던 지난한 시간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20년, 팬데믹에 놓이면서 모든 것들이 통제되고 멈춰졌어요. 이런 과정을 직접 겪으면서 심각함을 느꼈어요. 인간 때문에 위기가 초래됐고, 이것을 극복할 방법도 결국엔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어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후위기의 본질을 고민했습니다."
<균발견_극장균>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인간을 위한 장소(극장)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비인간 존재(균)을 발견하는 프로그램." 균사를 공부해온 윤혜진 연출이 중심인 '균넼'(균 네트워크의 줄임말이란다)은 김혜원 무대미술가, 신지연 작가, 박수진 배우, 윤소희 작가, 선과영 음악가가 함께한다.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극장 백스테이지에서 배양된 극장균을 관찰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보이지 않던 균을 만날 수 있다.
"극장… 무더운 여름에도 서늘하게 유지되는 버섯을 떠올렸어요. 그것은 인류보다 앞서 존재했고, 해체하고 분해하며 지구를 회복시킵니다. 인류가 아닌 존재가 지구의 재생을 맡는 것이 인상적이잖아요."
이들의 작업은 극장에 존재하는 균을 발견해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 방법을 '발효'라 믿었다. 연출가는 창작자로서 자신이 있는 극장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는 극장에서 기후변화와 자연환경을 재구성할 방법을 고민했지만, 기후위기를 극장으로 가져올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래서 역시 기후위기와 같이 실생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극장에서도 직접 체험해 봐야 진정한 깊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번 프로그램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어서 연출가는 다음과 같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지금 극장은 (인간을 위한 혹은 인간에 의한) 연극을 생산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인류 이전에 있었던, 인류 이후에 있을 '것'들의 '곳'으로 공유될 수 있을까?'
'극장이라는 인간적인 공간에 비인간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어떨까?'
끊임없이 샘솟는 질문을 사유하면서 극장에서 버섯을 키웠고, 직접 배양을 하면서 인간 중심의 장소였던 극장에 비인간 존재가 머무르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해서 마침내 도달한 결론. 연출가는 '균넼'에서 추구하고 싶었던 것은 '균 카니발리즘'이라며 그 이유를 이렇게 들려줬다.
"인간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부분입니다. 인간도 균이고, 우리는 균의 네트워크 안에서 살고 있다는 관점을 견지했어요. '카니발리즘'이 동족포식이잖아요. 균도 나를 먹고, 나도 균을 먹는다는 개념에서 시작되었죠. 저희가 기후위기 시대의 먹거리에 관한 고민이 있어서, 극장에서 발견되는 균을 통해 카니발리즘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균·기후위기·먹거리·연극성 등을 키워드로 작업을 이어왔다. 카니발리즘은 연극성의 일부분으로, 균을 공유하는 과정으로 가져왔다. 균이 먹거리가 되는 과정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려는 것인데, 그가 버섯을 키울 수 있었지만 식용이 어려워 안전한 먹거리에 시즌을 기했다. 가령, 콤부차나 르뱅과 같이 접근하기 쉬운 것부터.
"관객과 극장을 둘러보며 극장 균을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순간을 공유하고 싶어요. 현미경과 같은 확대 장비로 백스테이지 투어를 담아내는 것이죠. 저희가 기록한 내용을 관객들과 공유하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저희가 채취한 균을 배양해서 관찰하고, 균의 존재를 알리고, 극장에서 발효한 르뱅을 관객과 나누면서 카니발을 준비했어요."
연출가는 백스테이지 투어를 통해 우리가 극장에서 만나는 균의 고민을 구체화했다. 최종 결과물은 백스테이지 투어의 확장판이 될 것이란다. 극장이 내뿜는 의미가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를 구석구석 본다는 것. 그리고 균을 만나는 것에 의미를 두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디든 균이 존재합니다. 균을 새롭게 가지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있는 균을 발견하는 거예요. 극장이라는 장소는 인간을 위한 장소이고 인간의 서사를 다루는 곳이잖아요. 여기에 인간이 아닌 비인간이 존재한다면, 균이 있을 거예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우리는 균을 만나보려고 접근한 거죠. 균이 눈에 잘 보이지 않으니 가시화하는 방식으로 발효를 선택했어요. 많은 사람이 균을 오염으로 인식해요. 코로나 이후로 균은 인간에게 해로운 것으로 인식합니다. 하지만 우리 몸 안에 엄청 많은 균이 있는데, 이로운 균도 많아요. 오염과 이로움도 결국 인간의 시선에서 규정된 거지 그게 정말 나쁘고 해롭다고 규정할 수 없어요. 이렇게 균에 대한 새로운 인식, 공존과 상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백스테이지 투어>를 참관한 극장의 의도
이번에 참여한 <백스테이지 투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아래 '예술극장')이 <기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6월 1일~2일까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아르코예술극장 앞마당과 백스테이지에서 진행되는 <백스테이지 투어>는 '배트(bat) 스테이지 투어'(이성직 연출), '극장 앞 텃밭, 텃밭 뒤 극장'(전윤환 연출), '균발견_극장균'(윤혜진 연출) 등으로 구성됐다.
앞서 소개했지만, 예술극장(강량원 극장장)은 '기후위기 시대에 극장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거듭하면서 그 사유의 과정을 예술현장과 함께하기 위해 지난 3월에 <기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번 프로그램은 그 실험과정을 이어온 것이며, 새로운 창작방법론을 시도함으로써 지속가능한 기후담론 생성의 플랫폼을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다.
올해의연극 베스트3(2013, 2016)과 동아연극상 연출상과 작품상(2016)을 휩쓸며 연극계에서 자신만의 색깔를 탄탄하게 굳힌 강량원 연출가가 3년 전에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의 극장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대학로의 상징과 같은 극장의 색깔은 강량원만의 색채가 더해져 더욱 눈길을 받았다. 특히 그가 극장장을 맡았던 시기는 묘하게 코로나와 겹쳤는데, 이것을 곱게 흘려 보낼 그가 아니었다. 팬데믹이라는 외부 공격에 직격탄을 맞으며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 숙명에 처해진 시기였다. 이와 관련하여 <백스테이지 투어>가 공식적으로 열리기 전날(5월31일)에 극장 스태프들을 대상으로 리허설을 겸해 마련된 자리에 극장장이 직접 참가했다. 수백 번을 오갔을 백스테이지였지만 신중하게 대하는 그를 만나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한 의도에 관해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 <기후 프로젝트>는 어떤 계기에서 만들었는가?
"기후위기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무엇보다 공연계에서는 코로나 사태를 통해 극장이 문을 닫았고, 작품이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런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예술을 해야하는 예술가들에게는 기후위기가 훨씬 피부로 다가왔다. 이후 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지만 옛날로 돌아가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것이 맞는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프로그램을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앞서 말했지만, '극장은 어떤 방식으로 이런 재난을 대비하고 관객들과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어떤 식으로든 공유하고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코로나 이후에 계속 기후위기에 관련된 학습, 워크숍 등을 해왔고 이번에는 우리 창작자들과 함께 극장에서 상주하면서 기후위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공유하는 프로그램이다."
- 같은 고민거리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창작자의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균, 박쥐, 텃밭 등 서로 다른 세 개의 주제는 창작자들이 스스로 찾았다. 작년에 이들은 스스로 극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 것인데 우리(예술극장)는 판을 깔아준 것이다. 극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것을 창작자들과 함께 워크숍을 거치면서 제안한 내용을 토대로 이번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 <백스테이지 투어>에 직접 참여해보니 소감이 어떤가?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체험해보니까 이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 몸 안에는 좋은 균과 나쁜 균이 있다고. 나쁜 균은 함께 살수 밖에 없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막상 극장 안에서 같이 다니면서 균을 발견해보니, '극장뿐 아니라 우리 삶 속에서 균이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를 느꼈다. 그렇다면 균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균이 사실상 인간의 영역과 비인간의 영역을 나눈 것처럼 이런 과정도 인간 중심이었고, 같은 방식으로 기후위기라는 재난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비인간을 계속해서 들여오게 만드는 것을 감각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이번 프로그램 이후의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 '기후위기'를 주제로 다루는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 보다는 새로운 창작방법론의 형태를 탐구하며 현장의 예술인, 시민들과 공유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실험들을 해나갈 것이다. 탄소절감을 위한 노력을 피할 순 없지만, 창작자로서 뭔가 '생산'을 하며 기후위기를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에 대한 사유다. 가장 뜨거울 7~8월에는 다양한 주제로 기후 워크숍을 열어 보다 많은 이들과 담론을 나누고 싶다. 그 이후에도 무엇이든 우리의 실험을 지속가능하게 하여, 극장에 오면 자연스럽게 기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고 싶다."
- "기후위기 시대에 극장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본질적인 고문에 대하여 (프로그램에 참관한 이후) 스스로 정답을 찾았나?
"기후위기의 시대에 두 가지 방향이 있다. 하나는 조금 더 인간이 잘 살 수 있도록 과학기술을 통해서 재난과 싸우고 계속해서 해결해나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금 기후위기가 온 것이 우리가 너무 인간 중심으로 살아온 것이 아닌가하는 믿음이다. 결국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이 상생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둘 중 무엇이 우선이라고 자신할 순 없다. 하지만 모두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기후위기를 이겨내서 상생하는 지혜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