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큰아이의 생일선물을 사러 쇼핑몰에 갔다가 서점에 들렀다. 책의 종말을 얘기하는 시대지만 주말 서점에 가면 이 말은 말짱 거짓말 같다. 매대와 책꽂이에는 책이 가득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서서 혹은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 읽고 있다.
광고 서적으로 즐비한 매대를 잠시 훑어보다 베스트셀러 진열대로 걸음을 옮겼다. 먼저 종합 베스트셀러를 살폈다. 3위에 오른 책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가 눈에 띈다. 출판사 이름이 생소해서다. '퍼스트펭귄'.
판권을 펼쳤다. 출판등록일이 작년 7월이다. 1년도 되지 않아 베스트셀러에 진입하다니! 놀랍다.
북칼럼니스트 홍순철에 따르면 <나를 소모하지 않는 현명한 태도에 관하여>는 퍼스트펭귄의 첫 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책은 2017년 국내에서 출간됐던 <조용히 이기는 사람들>(이마)의 개정판이라고 한다.
그때는 주목받지 못했던 책을 새로운 기획과 제목으로 내놓아 베스트셀러에 진입시킨 걸 보면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일까. 요즘 신생 출판사에는 '구간 발굴과 개정판 출간'이라는 생존 공식이 자리 잡은 분위기라고 한다(출처 한겨레 신문
신생 출판사의 생존 공식 '구간 발굴과 개정판 출간').
퍼스트 펭귄은 선구자 또는 도전자를 일컫는 관용어로 널리 쓰이는 단어다. 그 관용어를 출판사 이름으로 내걸고 출간한 지 석 달 만에 종합 3위를 찍은 출판사. 앞으로 눈여겨봐야겠다.
소설 베스트셀러도 살펴보았다. 소설 분야 1위는 몇 년째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가 양귀자의 소설 <모순>이다. 언론에서 2030세대 여성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던데 여전히 그런 모양이다. 출판사는 '쓰다'. 이곳은 2012년에 출판등록을 한 곳으로 이후 양귀자의 책을 차곡차곡 발행하고 있는 출판사다.
국내 팬층이 두터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녹나무의 여신>이 4위에 오른 것도 시선을 끌었다. 출판사는 '소미미디어'. 이곳은 일본 작가의 작품을 주로 출판하는 곳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미출시작과 신작을 발표해 입지를 다진 곳이다.
소설은 나무옆의자(<나의 돈키호테>, <불편한 편의점>), 자음과모음(<삼체>), 다산책방(<흐르는 강물처럼>,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은행나무(<구의 증명>), 문학동네(<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민음사(<싯다르타>, <인간실격>), 위즈덤하우스(<파과>) 등 대체로 익숙한 출판사들이 포진해 있다.
여타 분야에 비해 확실히 문학 분야는 신생 출판사들이 진입하기에는 장벽이 높은 듯하다. 9위에 오른 <룬의 아이들>을 펴낸 엘릭시스 역시 문학동네 임프린트 출판사(하위 브랜드)이므로 신생 출판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책을 보면 저자뿐만 아니라 출판사에도 관심을 가진다. 낯선 이름의 출판사는 자료를 찾아보고 탄생 비화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러다 보면 책 한 권에 담긴 세상이 작품만 읽을 때보다 훨씬 풍성해진다.
지난해 기준 문체부에 등록된 출판사 숫자는 7만 7324개라고 한다. 신생 출판사도 매년 3천 개 이상 생겨난다고 한다. 영상 매체가 나날이 발전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왠지 모르게 위안을 준다. 글의 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