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풋살하실래요?"
그러니까 그건 예정된 운명같은 말이었다.
2023년 가을, 사무실 옆자리 후배가 나에게 묻기 9개월 전부터 나는 "풋살해야지, 올해에는 꼭 해야지" 하고 있던 중이었다. 풋살을 마음에 품은 지는 오래됐지만, 겨울엔 추워서 여름엔 더우니까… 하고 미루던 게 1~2년을 넘어가고 있었다. 풋살 소셜매치 어플을 깔고 스케줄만 들여다보길 몇 달이었다.
속으로 다짐만 하던 내가 스스로 민망하여, 급기야는 그해 다이어리 첫장에 '2023년 올해 목표' 1순위로 풋살을 적어놓은 터였다. 더이상 발을 뺄 수 없는 괄호 내용('더 늙기 전에')과 함께.
마흔에 시작한 풋살로 주 6일 운동 "니가 태릉인이냐"
정말 더는 미룰 수 없었다. 마흔이 두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아 진짜 더 늦게 시작하다간 내 관절이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미룰 땐 미루지만 한 번 시작하면 제대로 하는 나는 ISTJ답게 바로 집 근처 풋살 학원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별로 없던 학원이 <골 때리는 그녀들> 열풍 덕인지 주변에 몇 군데 생겼고, 그중 집에서 가깝고 가장 최근에 생긴 곳을 골라 등록했다.
그렇다고 풋살을 시작하기 전에 운동과 담을 쌓고 지냈던 건 아니었다. 8년째 취미로 스쿼시를 치고 있었고, 월·수·금이면 2시간씩 운동을 했다. 물론 풋살을 시작했다고 해서 스쿼시를 그만두진 않았다. 내 피부같은 존재인 스쿼시를 유지하면서 풋살 스케줄을 추가하니 나는 어느새 월·수·금 스쿼시, 화·토 풋살, 일요일엔 등산을 하는 사람이 돼 있었다. 그나마 하루 운동이 빠진 목요일은 '돼지우리'에서 살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집안일 데이였다.
친구들은 내 운동 스케줄을 보더니 "니가 태릉인이냐", "니 직업이 대체 뭐냐", "아니 스쿼시를 그렇게 하더니 이제 풋살이냐" 놀라움과 감탄을 담아 혀를 차기 시작했다. 약속을 잡으려 해도 "아 그날은 스쿼시 가는데, 아 화요일은 진짜 안돼 풋살이라" 이런 레퍼토리가 반복됐다(그래도 내 착한 친구들은 휴가를 맞춰 운동이 없는 점심 약속을 잡아줬다).
"나이스 마이볼" '행복 축구'의 힘
2023년 11월 5일, 대망의 풋살팀 창단식이 열렸다. 대학교 축구대회 득점왕 출신 감독과 초등학교 축구선수 출신 코치까지 회사 내부에서 섭외해 15명 가량의 선수 명단을 채운 '사내 여자 풋살팀' 마이볼은 어느 순간 <오마이뉴스> 최대 모임이 돼 있었다.
풋살팀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처음 풋살을 접하는 초보 중의 왕초보였다. 2주에 한 번 모여 공을 찰 때마다 공은 내 마음과 다른 방향으로 가기 일쑤였지만, '행축(행복 축구)'이 모토인 우리는 공이 발에 닿기만 해도 "나이스"를 외쳤다. 선 나이스 후 풋살. "나이스"의 생활화는 어느덧 몸에 배서 친선경기 땐 경기장에 선수가 입장만 해도 "나이스 OOO"가 먼저 나왔다.
"나는 우리 팀이 너무 좋아, 칭찬을 잘해줘."
처음에 풋살팀에 올까 말까 고민하던 선배는 공 차는 재미와 "나이스" 효과로 나처럼 '풋살 사교육' 시장에 합류하더니 유망 공격수로 성장 중이었다. 실로 '나이스 효과'는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잘했다고 칭찬 받으니 못해도 눈치볼 필요가 없고, 자신감 있게 재미있게 하다보니 모든 팀원들의 실력이 일취월장 성장했다. "나이스" 이 한마디는 초록 잔디 위에서 돌고래 대신 우리를 춤추게 하고 있었다.
'나이스-행복' 축구를 하던 우리지만, 창단식 때 걸었던 현수막엔 어마어마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우승 간다" #못이기면 #집못감'. 고양이 탈 뒤에 숨은 호랑이 기운이랄까.
창단 7개월 만에 '4강 신화' 뒷이야기
'행축'을 하던 우리는 5월 기자협회 여성 풋살대회를 앞두고 '집중 모드'에 들어갔다.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풋살장에 모이는 날들이 늘어났다. 풋살 영상을 공유하고, 대회용 풋살화도 새로 샀다. 팀 훈련 중간중간 <오마이뉴스> '축구왕' 시민기자들을 모시고 친선 경기를 하고, 다른 팀과도 매치를 이어가다보니 5월 25일 대회날이 다가왔다.
선수들과 응원단까지 4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른 아침 파주 경기장에 모였다. 회사 인원의 절반 가량의 대이동. 그러니까 대이동만큼이나 풋살팀은 대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아침 9시에 파주까지 온 사람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다. 나는 이미 그 전주부터 풋살 경기하는 꿈을 3일 연속으로 꾸고 있었다. 내가 자는 건지 풋살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꿈에서처럼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32강 JTBC를 2대 0으로 이기고, 16강에서 만난 <서울신문>. 생각보다 풀리지 않는 경기에 답답하던 차에 페널티 구역에서 상대 핸들링 반칙이 나왔다. PK 1번 키커인 나는 골대 앞에 섰다. 그러니까 그 자리는 영광과 역적 후보의 자리였다. 들어가면 영광, 안 들어가면… 내 킥은 슬프게도 골키퍼 선방에 막혔고, 그 이후 나는 다른 팀원들 말에 따르면 "각성한 듯" 뛰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이 경기장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골을 넣어야 했다. 골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나는 몇 분 뒤 정말 그림처럼 선제골을 넣었다. 누군가는 '2002 안정환의 재현'이라 표현했는데, 안정환 선수가 나중에 밝힌 당시 심정처럼 나도 "속으로 울면서 뛰었다".
8강 MBC전을 지나 4강 CBS전. 우리의 도전은 거기에서 멈췄다. 무승부로 끝난 게임에 승부차기까지 이어졌지만, 그날 승리의 여신은 우리를 향해 미소 짓지 않았다. 풋살대회 시작 전 "난 3번은 이기고 싶어"라고 팀원들에게 말했었는데, 3번을 이기면 딱 4강이었다. 그때 5번 이기고 싶다고 말했으면 올해 우승까지 했을까. 그런 궁금증이 일었지만 후회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격렬한 몸싸움과 갑작스럽게 늘어난 운동량에 몇몇 선수는 가슴뼈 염좌로 숨만 쉬어도 아픈 고통을 참으며 뛰었고, 무릎과 허벅지가 멍들고 까진 건 다반사였다.
예전에 조기축구회 다니는 아저씨들을 보면 그냥 공 차는 게 재미있고, 뒤풀이가 신나서 운동하나 보다 했다. 그랬던 내가 풋살을 하면서 알게 된 게 있다. 풋살이란 팀 운동에는 개인 종목에는 없는 '우리'가 있었다.
나 대신 상대 선수를 몸으로 부딪혀 가며 스크린해주고, 나 대신 한 발 더 뛰어주는 동료들이 운동장 안에 있었다. 공은 마지막 순간 공격수 발을 떠나 골대 안으로 들어가지만, 그 공이 거쳐온 미드필더-수비수-골키퍼가 없었다면 화려해 보이는 득점의 순간도 없었다.
대회를 준비하며 느낀 건 그런 '우리'의 힘이었다. 그리고 경기날 찍힌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가 진심으로 기뻐했구나, 진짜로 즐거웠구나를 느꼈다. 다 큰 어른이 저렇게 아이처럼 해맑게 웃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기사를 빌려 다시 한 번 현장에 찾아와 목이 터져라 응원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엄마, 아빠 손잡고 와 끝까지 이모들을 응원해준 승재, 세연이, 예림이, 선우, 지한이, 이안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몸으로 마음으로 함께 뛰어준 선수들과 감독, 코치진에겐 그날 건배사로 수십 번은 외쳤을 이 말로 대신한다.
"내년엔 우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