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시인 정지용(1902.6.~1950.9.)의 고향 충북 옥천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을 찾았다. 전북 군산시는 주민들에게 다양한 영역의 문화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동네문화카페>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나는 글쓰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모인 <시와 에세이를 위한 글쓰기강좌>의 강사를 맡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 중에 '문학관 탐방' 시간이 있는데, 이번 학기는 정지용문학관을 택했다.
정지용은 1920년대~1940년대에 활동했던 주요시인 중 한 사람으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 선구자요, 굳건한 토대를 세운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930년대에 시단(詩壇)을 대표했던 시인이었고, 동시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기림은, 정지용을 일컬어 '한국의 현대시는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시 쓰기 시작한 때... 정지용이 추구했던 문학세계
문학관을 찾으면서 무작정 놀러 가는 마음보다는, 하나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정지용시인의 삶과 활동내용,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문학세계 등에 대한 글을 읽어보았다.
분단 이후 오랫동안 월북작가로서 구속되었던 그가 많은 문인들의 청원에 힘입어 1988년 해금 조치 되고, 그의 시 <향수>를 비롯한 시와 산문들이 발간된 덕에 대중들에게 다시 알려졌다는 사실도 알았다.
특히 1989년 테너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의 듀엣노래로 불려진 그의 시 <향수>는 정지용 시인이 일본 유학시절 고향 충북 옥천을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이 시는 현재 우리나라 교과서에 등재되어 있는데,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우리말 구사와 반복되는 후렴구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로 표현되는 리듬감은 시인의 고향과 보고 싶은 고향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닮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아름다운 시적 표현은 시와 산문 공부를 하는 문우들의 마음까지도 설레게 했다.
시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 납북 때까지 그의 시 세계관을 읽어보았다. 1926년부터 1933년까지의 시기에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시작(詩作)과 우리말을 아름답게 펼치며 향토적 정서를 담은 순수 서정시를 썼다고 한다. 현재에도 대중적 사랑을 받는 '향수'(조선지광, 1927)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그 이후 1935년까지는 '가톨릭청년'의 편집인으로 활동했던 터라,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종교적 시들이 많다. <그의 반>, <불사조>, <다른 하늘>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납북이전까지 발표한 작품은 전통과 자연을 표현한 시들이다. 대표 시로 <장수산>, <백록담>은 정교한 언어로 자연을 표현하여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 산수시(山水詩)라는 별칭이 있다.
책방을 하다 보니 신간구매에 좀 더 자유로운 편인데, 올해에 나온 신간 <정지용 만나러 가는 길(국학자료원, 김묘순지음, 2024)>이 눈에 띄었다. 이미 첫 번째 책(2017년)이 나와 있어서 두 권 모두 구매하여 읽었다. 김묘순 작가는 30년 넘게 정지용의 고향 옥천에 살면서 정지용의 문학세계를 연구하는 사람으로, 시인이자 수필가였다.
이 책은 '정지용의 기행산문 여정을 따라'라는 부제가 있는데, 김 작가가 정지용시인이 생전에 공부를 하거나 여행을 하면서 머물렀던 장소를 따라가며, 정시인의 생애와 그를 둘러싼 사람, 역사, 환경 등에 대한 서술이 재밌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시인들, 김기림, 김영랑, 윤동주,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청록파시인들의 등단), 신석정, 이상 등과의 인연 이야기는 흥미롭다.
전북 군산에서 1시간 30분여 만에 도착한 충북 옥천군 정지용 문학관과 지용생가터. 소담한 초가지붕돌담장 안에는 여름향기를 가득 담은 보리수나무의 빨간 열매가 손님맞이를 해주었다. 어찌나 토실토실하게 열렸는지 주인장의 허락도 없이 열매 따는 손과 입이 부지런해졌다. 동시에 <향수>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문우들은 대청마루에 앉아 시인의 정취를 느꼈다.
이어서 방문한 '정지용문학관'에서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친절한 안내가 있었다. 정지용 시인의 태생부터 문학세계, 그리고 현대시의 초석을 다진 그의 활동내용, 함께 시작활동을 했던 동시대의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한 그의 시문학정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매년 5월, 정지용시인의 생일달에 열리는 '지용제'를 통하여, 우리의 언어를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 정지용을 추모하며 그의 문학정신을 더욱 발전시키자는 지역민들의 염원을 담은 행사가 이어지고 있단다. 지용문학상과 정지용 전국 시낭송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문학행사와 시화전이나, 시가 있는 향수 음악회 등의 부대행사도 곁들인다는 해설사의 설명이 있었다.
전시관 한쪽 면에 비치한 시낭송용 시청각부스에서 함께 간 문우들은 정지용시인의 시 <향수> <호수> 등을 낭독하며 즐거워했다. 1900년대 초, 근대의 시작점에서 한 사람의 시인이 보여준 시문학세상은 단순히 문학활동을 한 인물이라는 점을 넘어섰다. 식민지시대 우리 문학인들의 보여준 기개와 역사의식, 그리고 세계화의 물길을 열어준 대표적인 인물을 만났다는 점에서 특별한 문학탐방시간이었다.
옥천군민이 '정지용 문학관'에 가지는 자긍심은 방문객을 대한 태도에서도 확연했다. 우리와 만난 해설사는 해박한 지식정보는 말할 것도 없고, 주변 탐방할 장소로, 옥천 전통문화체험관과 옥천향교, 교동저수지 등에 대한 설명도 잘해주었다. 특히 전통문화체험관에서 전시 중인 사진전시회 <향수>-사라지는 골목길 풍경- 역시 찾아간 보람이 있는 작품 전시회였다.
함께 간 문우 강 선생은 <향수> 시를 낭독하며 우리말에 대한 퀴즈를 내니, 다른 문우가 화답하며 또 다른 연을 낭독해 답하기도 했다. 결이 같은 사람들이 즐기는 여행의 진미(眞味)를 만끽했다.
"비에 젖거나 서려있는 가지런한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 무엇일까요?"
"'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에서 '함추름'이요."
오늘 다녀온 여행은, 과거 정지용 시인의 말대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 느낀 시간이었다.
근대시인들의 시를 더 공부하여, 순수하고 아름다운 우리 고유어를 접목한 글쓰기를 해야 하겠다는 문우들 각자의 다짐이 해맑은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처럼 낭랑하게 들렸던 시간. 글 하나를 통해 이렇게 좋은 인연들이 만나니 참으로 고맙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