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요즘 왜 그렇게 화분에 정성을 쏟아?"
전에 없이 화분을 자주 들여다보는 내게 남편이 물었다.
"난 요즘 자기 의지 없는 것들이 좋더라."
화분 속 식물은 내가 정성을 기울여 돌봐주는 만큼 예쁘게 자랐다.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조용히 새 순이 올라오고 잎을 피워내는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식물을 보면서 최근 나를 속상하게 하는 고1 딸아이를 생각한다. 내 아이도 저 식물처럼 조용히, 예쁘게만 피어나던 때가 있었는데... 우리 사이가 왜 이렇게 된 걸까?
아이가 변한 건 중학교 3학년 무렵, 한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서부터였다. 가끔씩 아이의 귀가 시간이 늦어져 물어보면, 부모님이 늦게 퇴근하시는 친구 집에서 놀다가 온다고 했다. 그러다 조금씩 아이가 내 전화를 잘 안 받는 날이 많아졌고, 아이를 혼내고 반성문을 쓰게 하고 외출을 금지시키는 일들이 생겼다.
아이는 그 친구와 같은 고등학교를 진학했고, 늘 붙어 다니면서도 할 말이 남아 밤늦게까지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았다. 말 없이 늦는 날이 점점 많아졌고, 내 잔소리 데시벨은 점점 올라갔다.
며칠 전에 아이가 하교 후에 친구와 영화를 보고 들어오겠다는 통보만 하고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읽지 않다가 밤 열 시가 넘어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나와 남편이 잔소리를 하니, 아이는 가만히 앉아 듣다가 '네네'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한번은 부모 몰래 예식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일까지 발각되었다. 우리한테 혼날까 봐 말을 못했다니, 기가 막혔다. 아이는 남편과 내가 하는 말에 계속 '잘못했습니다'와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반성을 한다기보다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시 당하는 기분도 들고, 부모인 우리한테 왜 마음의 문을 닫으려 하는 건지 답답했다.
하,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딸아이는 어릴 때부터 순하고 긍정적인 성격이었고, '엄마가 우리 엄마라서 다행이야'라든가 '나는 커서 엄마 닮고 싶어' 같은 말을 하기도 해서 우리가 이런 갈등을 겪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햇빛과 물만 있으면 조용하고 다소곳하게 자라나는 식물처럼 내 아이가 그렇게 자라주길 바랐다. 내 아이에게 사춘기가 없을 거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 하지만 딸아이한테 흔히들 말하는 중2병처럼 심한 증상이 없었을 뿐, 아이도 분명 여러 가지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나는 마냥 어린애처럼 아이를 대하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아이는 늘 잔소리만 하는 엄마보다는 소통이 가능한 친구가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전에 사무실에서 키우는 식물이 자꾸만 죽어버려서 화원에 물어보니, 식물을 키울 때 햇빛과 물도 중요하지만, 통풍이 잘 돼야 한다고 했다. 통풍이 잘 되지 않으면 화분 속에서 물이 썩어 뿌리가 썩고 결국은 식물이 다 죽게 될 수도 있다면서.
아이한테 이 시기(사춘기)의 친구는 창가에 부는 바람 같은 것이 아닐까? 바람이 젖은 흙을 말려 뿌리가 썩지 않게 해 줄 테니 줄기가 흔들려 꺾여버릴까 걱정된다고 창문을 너무 꼭꼭 닫아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흙이 마르는 시기를 잘 발견해 적당히 물만 주면 되는 것을.
잔소리는 불안한 마음에서 나온다. 세상에서 엄마가 최고로 좋다던 아이가 친구를 더 좋아하는 것에 질투도 나고, 혹시나 친구로 인해 안 좋은 영향을 받게 될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잔소리는 관계만 악화시킬 뿐이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오려는 잔소리를 참고, 식물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만히 바라보면서 심호흡 몇 번 하고 나면 어느새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춘기 아이와 잘 지내기 위한 소통의 기술을 공부하고 있지만, 부모로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식물을 키우면서 마음을 가라앉힌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 게재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