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6일 목요일
오늘은 이창동 감독이 광주에 오는 날이다. 영화 <박하사탕>을 보았던 것이 2000년 어느 날이었다. "나 돌아갈래" 설경구의 울부짖음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오후 2시에 역으로 배웅하러 갔다. 몇 분이 더 흘렀을까? 저만치에서 감독이 걸어오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털,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을 신고 오고 있는 이분은 한눈에 보아도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먼 길 와주시어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좀체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분이다. 오직 자신이 만든 영화로, 영화를 통해 대중과 대화할 뿐이기에 감독은 굳이 대중 앞에 나서서 말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단다. 그런데 오월 광주가 부르기에 거부할 수 없어 오셨다고 한다. '광산아카데미' 강좌에 강사로 초빙어 오신 것이다.
강연은 1980년 5월 18일 오전 9시, 경북대학교 앞의 상황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날 학교 앞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어야 했는데, 아무 일이 지나가 버렸다.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을까 이창동 감독은 친구들과 함께 친구의 자취방에서 새벽까지 고스톱을 쳤다고 한다.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문학청년이었으나, 이후로 오랫동안 아팠단다. 글을 써야 했으나 오월 광주는 문학으로 보둠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1980년대의 10년이 다 가도록 글을 쓰지 못했다. 이청준과 김승호는 4.19를 가지고 글을 썼고, 황석영과 조세희는 1970년대 산업화의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글을 썼다. 이창동처럼 1980년대 작가들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목격한 문학청년들은 선배들과 달리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창동은 한 치도 흔들림 없는 자세로 똑바로 서서, 두 시간이 다가도록 한 곳에 서서, 젊은 날의 아픔을 담담하게 고백했다. 소설 쓰기에서 영화제작으로 전환했고, <박하사탕>을 낸 것은 밀레미엄의 전환기 2000년이었다.
영화 감독으로부터 직접 영화 제작의 비사를 듣는 것도 흥미로웠다. <박하사탕>을 찍기 위해 적합한 굴다리와 강가를 찾느라고 전국의 100여 곳을 답사했다고 한다. 작품 속의 굴다리는 충북 진천이 촬영지란다.
느닷없이 호출된 이등병 영호(설경구 역)는 광주역 철로변에 숨은 여성을 살해했고, 그 피묻은 손으로는 더 이상 순임(문소리 역)을 사랑할 수 없어 이별을 선택한다는 <박하사탕>의 줄거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영화를 다시 봤다.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가 초연 배우였다고 한다. 설경구도 그렇고, 문소리도 그렇단다.
이창동 감독의 조용하면서 잔잔한 고백조의 강연은, 어느 강연과 다른 진실함을 청중에게 전했다.
5월 17일 금요일
오늘은 서울에서 내가 쓴 책 <시민군>의 출판기념회를 여는 날이다. '노무현재단시민센터'에 연락하여 강당을 대관하고, 웹을 만들어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하고, 축하 말씀을 해 줄 분들을 섭외하고, 사정상 오시지 못하는 분들께는 영상 편지를 부탁하고, 축시를 읊어줄 시인과 축가를 불러줄 가수를 뵙는 일들이 하나같이 힘든 일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힘든 일은 참석자들을 초대하는 일이었다. 강당의 자리는 140석인데, 오실 분들을 점검해보니 60여 분이었다. 이를 어쩌나...
오후 6시가 돼 반가운 옛 동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병식 선생의 부인 김순진 여사를 필두로, 바빠서 도저히 올 수 없는 박석운 선생을 위시해 1980년 5월 서울의 봄 당시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이 모두 와주었다. 안동에서 온 차명숙 선생은 "시민군이 소환해 이곳에 왔다"고 짧게 인사고, 안산에서 온 경창수 선생은 고3 학생으로서 겪은 1980년 5월의 일을 말했다.
모두들 바쁠 터인데 이렇게 와주신 동료들이 반가우면서도 미안했고, 고마우면서도 민망해, 나는 무대에서 내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성악가 정찬경 교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바리톤의 장중한 음성으로 선창하였고, 다들 60대가 넘은 중년의 사나이들이 젊은 날의 기백으로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외쳤다. 2024년 오월항쟁 44주년 서울 기념식은 이렇게 거행됐다.
5월 18일 토요일
오늘은 오월 광주민중항쟁 44주년 기념식이 있는 날이다. 해마다 초대장이 오지만, 나는 여태껏 한 번도 망월동 국립묘지의 기념식에 가지 않았다.
이번엔 달랐다.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구경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 성싶었다. 택시를 불렀다.
국립묘지 입구는 자동차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경찰차가 절반이었다. 나는 절룩거리며 행사장을 향해 걸었다. 행사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했고, 그냥 행사장 밖에서 자리를 잡았다. 드론이 하늘 높이 날고 있었고, 야외에 설치된 화면을 통해 나는 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내가 44주년 기념식에 온 것은 "광주정신을 헌법에 넣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헌법 이야기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안철수, 김민석 등 정치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민주의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경남에서 온 경찰차가 눈에 많이 띄었다.
오후 3시,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오월 영화 <송암동>이 상영됐다. 1980년 5월 24일 광주의 변두리 송암동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공수부대원들과 전교사 소속 군인들 간에 오인 사격으로 많이 군인들이 살상됐다. 전교사 군인들로부터 피습을 당한 공수부대원들은 엉뚱하게도 송암동 주민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내가 알기로 동네 청년 권근립·임병철,김승우씨가 죽었고, 아주머니 박연옥씨가 죽었으며, 저수지에서 놀다 전재수, 방광범이 죽었다.
영화를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날 공수부대원들은 송암동에서 체포한 청년 시민들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즉결 처분을 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총소리가 스무 번 울렸다. 망월동에 묻힌 송암동 희생자는 여섯 명이지만, 스무 명이 즉결 처분당했던 것이다. 이들의 시신은 어디로 유기을까?
영화가 끝나고 <송암동>의 감독 이조훈씨가 관객 앞에 섰다. 젊은 감독인데, 오월에 관한 깊은 식견을 갖고 있어 나는 놀랐다. 감독은 세 가지를 부탁했다. '영화제작을 도와주세요. 엑스트라로 출연해주세요. 영화를 관람해주세요.'
5월 22일, 수요일
오늘은 의료인들의 구술을 듣는 날이다. 1980년 오월 광주의 병원들은 항쟁의 야전병원이었다. 총을 들고 싸운 분들이나 싸우다 중상을 입은 환자를 돌보아준 의료인들이나 다 같은 시민군이었다.
나는 젊은 날,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오늘 구술회에서는 최미자씨가 등장해 증언해 줬다. 당시 경신여고 3년생이었던 최미자씨는 귀가하는 골목길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포위를 당한 채, 총검으로 가슴을 난자당했다.
이제 육십이 넘은 나이이기에 자신이 당한 치욕에 대해 대중 앞에 나서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최미자씨는 당시의 상황을 담담하게 공개했다. 최미자 씨를 치료했던 오봉석 의사가 환자를 다시 만난 것은 44년만에 처음 이루어진 일이란다. 의사도 환자도 오늘의 재회를 감격해 하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구술회를 이끈 유용상 동고송 대표는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살면서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 많지 않은데요. 오늘 저는 가슴 뿌듯한 시적 감동을 느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