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지역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내 인생의 첫 책 쓰기 프로젝트' 강연회가 있었다. 가자마자 책을 만들어 주는 건 아니고 3주간 총 3회 차의 수업에 모두 참석한 학부모에 한해 심화반에 수강할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심화반을 수강한 사람 중에 글을 선별해 책에 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프로젝트는 작년에 처음 시행돼 올해로 두 번째를 맞는다고 한다. 기획안을 보니 심화 과정은 7월부터 시작이라 아이들 방학이 걸렸다. 하지만 일단 저질러보자, 그때 되면 방법이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냅다 참여 버튼을 눌렀다.
투병 이후 내게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나만 소소히 느낄 수 있는 변화 중의 하나는 의사결정과정이 조금 더 빨라졌다는 거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엄청난 에너지와 시간을 들였다. 한 번 결정하면 그걸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게 기본값이기도 하고, 뭔가를 하나 사면 꽤 오래 쓰고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그랬다는 게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물건 하나 사려면, 최대한 싼 값으로 최대한 좋은 거 사겠다고 인터넷 바다를 헤엄치는 나를 보고 남편이 말했다. "이 세상에 싸고 좋은 물건은 없어. 차라리 아무거나 얼른 사고 그 시간에 다른 걸 해." 그때는 남편의 말이 잔소리처럼 들렸다.
"오빠가 사달라고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물건 내가 매번 인터넷 뒤지고 뒤져서 더 싸게 샀던 거 몰라? 다 그렇게 해서 생활비 아끼는 거야. 그렇게 저축도 하고."
오히려 알아보기 귀찮다며 누가 봐도 똑같은 물건을 비싸게 사는 게 일상인 남편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나도 내가 생각하던 그런 바보가 됐다. 몇 푼 더 싸게 사겠다고 휴대전화를 오래 붙잡고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 노동이 만사 귀찮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때의 신랑 말대로 꼭 필요한 게 있음 자주 이용하는 사이트에서 얼른 사고 그 시간에 내가 해야 할 다른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편을 택한다. 신랑~당신이 진정 현명한 사람이었네. 역시 시간이 금이네 하면서.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강연장이 있는 시청 겸 도서관에 도착했다.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도성훈 인천시교육감의 연설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가 사는 지역 인천에서는 '읽, 걷, 쓰'라는 모토의 여러 가지 교육과 행사가 열렸는데 거기에 교육감의 인생철학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교육감은 처음 걷기 시작한 계기, 추운 겨울 오들오들 떨며 맨발 걷기를 한 기억, 아내와 함께 하는 행복한 걷기 생활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도 길고 넓은 산책길이 있는데 얼마 전 그곳에 황톳길이 생긴 걸 발견한 기억이 났다. 병원 생활이 길어져 미처 모르고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걷기 운동을 할 때마다 유독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많아져 놀랐더랬다. 콘크리트 바닥길과 평행선을 그리며 잘 정비된 황톳길은 마치 '맨발'로 걸으라고 멍석을 깔아놓은 듯했다.
내가 가끔 가는 우리 집 10분 거리 산에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2년 전만 해도 맨발 걷기를 하시는 분들을 보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동행자를 쿡쿡 찔러 알려줄 정도였는데, 요즘은 맨발로 걷는 사람들을 수시로 볼 수 있었다.
교육감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맨발 걷기의 열풍이 꼭 개인의 인식 변화나 미디어의 영향뿐만은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책적으로 읽·걷·쓰를 외치며 걷기의 중요성을 심어주고, 나아가 동네 곳곳에 걷기 좋은 길과 공원을 조성하고 맨발로 걷기 좋은 황톳길까지 업그레이드하니 주민들은 멀리 가지 않아도 자연스레 걷기 운동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운동할 목적으로 나왔다가 아름다운 길에서 꽃과 풀을 마주하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자연에 감화될 수도 있으니 힐링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나의 이야기다. 수풀 사이, 꽃 사이, 햇살을 이고지고 바람을 가르며 걷다 보면 물렁물렁해진 내 몸뿐 아니라 구겨졌던 마음도 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실행하고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선 우선 그럴만한 환경을 조성하라 하는데 지자체에서, 교육부에서 이런 일에 일조를 하는 것 같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도 교육감은 이 수업이 책 쓰기 수업인 만큼 '쓰기'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인천 시민 모두가 작가가 되는 날을 위하여라고 외치며 짧은(?) 강연을 마무리하셨다.
내가 존경하는 한 고전문학자는 도대체 왜 다들 읽기만 하고 쓸 생각을 안 하는지 답답하다고, 쓰는 사람이 되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듣게 돼 그런 분이 우리 아이들 교육의 선봉장에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 얼마나 그의 신념이 효과적일지는 모르나, 이것이 실무자들과 선생님들을 얼마나 번거롭게 할지는 모르나, 나 역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읽, 걷, 쓰'가 기본이라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0여 분간 계속된 교육감의 연설 덕분(?)에 시간이 빠듯해진 강사님은 속사포로 강연을 이었다. 책을 10권이나 쓴 저자답게 책 쓰기에 대한 유용한 팁과 경험이 녹아 있어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강연자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키우는 아빠였는데 강연 중간중간 주양육자로서의 고통과 애환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우리를 웃게 했다. 나 역시 가부장적인 사고에 절여졌는지 엄마나 조모들이 아닌 아빠가 주양육자가 되어 풀어놓는 이야기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시간이 부족하다고 아쉬워하셨지만 나와 동행한 지인은 강연장을 나오며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공부를 해서 그런지 유난히 배가 고팠다. 하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아이의 주양육자로서 글쓰는 저자에게 깊은 공감, 새롭게 배워가는 즐거움, 함께 배우는 공간이 주는 밝은 에너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오랜만에 책을 펼쳐 들었다. 잘 걷고 잘 쓰기에 앞서 나에겐 먼저 읽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 지역의 교육정책 '읽·걷·쓰'가 아이들 교육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나에게 좋은 자양분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