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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충격적인 사건이 보도되었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일제의 잔인한 만행이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밀리 환초 사건은 1945년 3월, 태평양 중서부 마셜제도의 동남쪽 끝에 위치한 밀리  환초(Mili Atoll, Mille Atoll)에 일본군에 의해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던 한국인노동자들이 밀리 환초 내 치루본섬에서 한국인들을 감시하던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미군에 투항할 계획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 다음날 반란 과정에서 달아난 일본군의 제보로 일본군 토벌대가 다른 섬에서 건너와 반란을 일으킨 한국인 노동자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미군이 마샬제도를 봉쇄하여 보금품 수송을 완전히 차단한 태평양전쟁 말기에 더욱 악화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은 남태평양 도서지역의 모든 섬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았다. 일본 본토로 향하는 과정에서 미군은 군사전략적으로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섬만을 점령하고 나머지 섬들은 고립 봉쇄했다. 그 결과 마샬군도의 밀리 환초는 일본 패전 때까지도 미군이 직접 점령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해군 함정으로 주변을 봉쇄하고, 간간이 소규모 전투를 수행하는 정도였다. 

그 결과 밀리 환초 주둔 일본군은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되었다. 먹을 것이 완전히 없어진 상황에서 조선인을 살해하고 식인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봉기를 일으켜 미군에 투항하려고 했지만, 즉각 출동한 일본군에게 무참히 진압되었던 것이다.

사실 밀리 환초 사건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밀리 환초에서의 한국인 반란 사건이 실재했음을 명백히 밝혀주는 미국 문서와 한국인 노동자들이 반란 이후 탈출하여 1945년 3월 18일 미군에 의해 구조되는 상황을 담은 사진자료 등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새롭게 발굴하여 2014년 8월에 공개하였다.

그리고 리코드 그룹(Record Group) 125의 해군법무감실 문서자료에 '태평양 지역 전쟁범죄(Pacific Area War Crimes Cases)'를 모아놓은 박스 중에 밀리 환초 관련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1945년 3월, 조선인 노동자들이 밀리 환초에 있는 치루본 섬에서 자신들을 감시하던 일본인들을 살해하고 미군에 투항할 계획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점, 다음 날에 반란 과정에서 달아난 일본군의 제보로 일본군 토벌대가 다른 섬에서 건너와 반란을 일으킨 조선인 노동자들을 집단 학살했다는 사실이 나와 있다.

그리고 당시 관련 자료 사진 설명에는 193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군)의 노예생활에 반발하여 반란(revolt)을 일으켰으며, 68명의 생존자를 미 해군이 구조했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이는 간접 증언 등을 토대로 알려져 있어 진위여부가 불확실했던 한국인 노동자들의 반란 사건이 실재하였음을 확인해주는 사진 기록이었다.

일본측 문서는 밀리 환초에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군무원'으로 분류하고 있어 이들을 일정한 대우와 임금을 보장받는 사람들로 오해할 소지가 있지만, 미군의 구조 사진에서 확인되듯이 조선인 노동자들은 강제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려 피골이 상접한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들은 강제동원으로 끌려와 당시 미군이 표현했던 것처럼, '노예노동자(slave laborers)' 상태였던 것이다.

이러한 끔찍한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일본의 양심적인 일본인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가 7일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 55명을 비롯해 밀리 환초에 동원됐다가 사망한 218명(1942~1945)의 이름과 본적지 주소를 최초로 밝히면서다. 

연구자인 다케우치 야스토씨는 '해군 군속 신상조사표'를 바탕으로 밀리 환초 사건 관련 생존자가 95명, 사망자가 55명이라며 이 가운데 총살에 의한 사망이 32명이며 자결한 희생자는 23명이라고 밝혔다. 사망자 55명 중에는 담양 출신이 25명으로 가장 많고 그 외에 광양 7명, 고흥 5명, 순천 4명, 광산 4명, 화순 3명, 보성 3명, 광주 2명, 무안 1명, 나주 1명 등 모두 전남이 본적지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또 대부분의 사망 피해자가 전남 출신임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에서조차 사건이 알려지지 않아 재조명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늦게라도 밀리 환초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회복과 역사적 재평가를 위한 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지금이라도 당장 밀리환초 사건을 조사하고, 진상을 규명하라. 그리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나서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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