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이게 뭐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꽃이다. 그것도 호야꽃. 좀처럼 꽃 피우기 어렵다는 호야. 분명 어제 물을 줄 때도 보지 못했었다. 하루아침에 이리 크진 않았을 테니 어쩌면 그 자리에 있었지만 오늘 내 눈에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이게 무슨 일일까. 호들갑을 떨며 재빨리 휴대폰을 찾아 사진을 찍었다. 호야가 9년 만에 꽃을 피웠다는 글을 봤던 터라 키우면서도 기대 하지 않았던 식물이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지난번, 베란다에 양상추를 심으면서 기존에 자리했던 화분들을 모두 선반으로 이동했기에 베란다를 나가야만 식물들을 볼 수 있었는데 오늘 물건을 찾으러 나갔다가 호야꽃을 발견한 것이다.
길게 늘어진 줄기에서 잎과는 다른 이상한 모양이 눈에 띄어 살폈는데 놀랍게도 말로만 알던 핑크빛의 호야꽃이다. 햇수로 4년 만이다. 선반으로 이동하고 어쩐지 구석에 있는 듯해 미안한 감이 있었는데 오히려 해를 직접 보지 않는 환경이 호야에게 맞았던 것일까. 핑크빛 하트모양의 난생처음 보는 호야꽃이 그저 신기하다.
21년 봄으로 기억한다. 처음 호야가 왔을 때 손바닥만 한 화분에 잎 몇 개 달린 아주 작은 다육이였다. 호야를 데리고 온 사연을 잠시 얘기하자면 당시 나는, 초면인 꽃집 주인의 도움을 받고 그냥 빈손으로 나오기 미안해 화분을 살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주인은 안 그래도 된다며 그냥 가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란 게 있어 바깥 도로를 점령하고 있던 다육이를 골랐다. 그러자 주인은 키우기 쉽다며 호야를 권했다. 식물 초보인 나는 그날 그렇게 키우기 쉬운 호야와 이름도 모르는 다육이 두 개를 가져왔고 베란다에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그땐 식물에 관심도 없었고 다육이는 꽃이 아니어서 눈길이 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 봄에도 살아있는 다육이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고 관심을 가져 보기로 했다. 다육이는 날로 번식했다. 몇 번의 분갈이를 하고도 화분을 흘러넘쳐나는 다육이를 어쩌지 못해 곳곳에 문의를 했지만 다들 엄청난 성장을 한 다육이에 놀랄 뿐 방법을 찾지 못했다.
호야도 화분을 넘쳐 아래로 아래로 향했지만 기둥을 세울 줄 몰라 화분을 그냥 높은 곳에 두고 줄기를 아래로 흐르게 했다. 그게 얼마 전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아래로 뻗은 줄기 끝에 꽃대를 세우고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생존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꽃이 피고 지고, 꽃이라고 불러졌을 때 꽃은 꽃이 된다. 엄마는 내가 소개팅을 나갈 때면 항상 "꽃으로 보여야 할 텐데"라며 응원 아닌 응원을 하셨다. 아직 꽃으로 불렸던 적이 없었던걸 생각하면 아마도 나는 다육이 호야를 닮아있는 것 같다. 언젠가는 꽃을 피우는. 피울지도 모르는 희망을 갖게 하는.
생전 외할머니는 나이 먹도록 혼자 있는 나를 보곤 "얼른 꽃을 피워야 할 텐데"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할머니, 십 년마다 한 번씩 피는 꽃이 있대요. 백 년마다 피는 꽃도 있고요" 그 말에 할머니는 황당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런 꽃이 있다고 정말?" 반문하셨다.
그러면 나는 "그럼요"라고 대꾸하면서 아직 꽃필 때가 아니어서 그렇다는 맹랑한 소리를 했었다. 그때는 모면하고자 둘러댄 말이었는데 실제 꽃 피우는 시기가 다 다른 식물들을 볼 때면 사람도 각자 꽃피는 화양연화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기다리는 일은 아름답고 고독하다. 흔들리는 잎을 보면서 바람의 존재를 아는 것처럼 가끔은 형태 없는 것들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맑은 어느 날 뜬금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피할 곳을 찾는 게 순서다. 미련 없이 가던 길을 멈춰야 한다. 망설일 필요도 없다. 그래야 곧 쏟아질 소나기를 맞지 않는다. 방향을 잃지 않는 게 삶의 지혜다.
바람이 분다. 나뭇잎들이 쉴 새 없이 흔들린다. 흔들리면서 살아있음을 노래한다. 호야꽃에 들떠 있던 그날, 어떤 이의 죽음을 들었다.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가진 그녀가 왜 스스로 세상과 이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해할 수 있는 죽음이 어디 있겠냐만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녀의 조건. 그녀를 본 적은 없지만 예쁘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내 책을 샀다고 했다. 연결고리는 그것뿐이다. 그녀라는 꽃은 그렇게 전화기를 통해 한 단어로 정리되었다.
한동안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여전히 바람은 불고 잎들이 쉴 새 없이 흔들린다. 그래 잘 매달려 있어라. 삶도 그런 것이다. 흔들리면서 버티는 것. EDM에 강강술래를 한다고 해도 빛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균형 잡고 리듬을 타는 것이 인생이다.
4년 만에 호야꽃이 피었다. 무성하게 넝쿨진 호야잎을 보면 누가 봐주지 않아도 인고의 세월을 버틴 아우성 없는 외침이다. 이상하게도 꽃은 넝쿨들이 없는 긴 줄기 끝에서 피어났다. 언뜻보면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언발란스하게 바닥에 늘어진 긴 줄기를 처음 보았을 때 잎이 돋지 않아 이리저리 밟히기도 하고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꽃을 피우기 위해 긴 외로움을 온몸으로 이겨내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밤마다 소쩍새도 천둥도 그렇게 울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피어난 한 송이 꽃이다. 그 어떤 누구도 스스로 세상과 등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