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진기는 우리 몸 안에 심장과 호흡 소리를 듣고 몸 상태를 진단하는 도구다. 이처럼 기획 연재 <청진기>는 청년의 시각으로 다양한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찾는다. 이를 위해 당신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개개인의 삶마다 사회에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곧, 당신이 필요하다.[기자말] |
매월 두 번째 일요일 제주시 한림읍 한림탁구장에서는 한림탁구동호회의 월례대회가 열린다. 이날은 동호회원들이 평소 연습하며 가꿔 온 실력을 뽐내는 날이다. 그러나 구장에는 대회의 긴장감보다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미리 온 참가자들은 "똑딱똑딱" 경쾌한 박자에 맞춰 라켓을 휘두르고 막 도착한 이들은 몸을 풀며 서로의 근황을 묻는다.
"의사 선생이 매일 탁구 친댄하난(친다고 하니까) 칭찬해줨쪄(칭찬해 주더라)"
"연습 그만하고 고치(같이) 복식하게 옵서예(와요)"
"오늘 네트가 나를 살림쩌게(살린다)"
어느새 구장에는 사람이 붐볐고, 여기저기서 "이제 시작하자"라는 말이 들렸다. 참가자들은 대진표를 확인하고 탁구대 앞에 섰다. "치고, 받고, 때리자!" 참가자들은 힘차게 구장 구호를 외치며 경기를 시작했다.
스무 명에서 시작한 작은 동호회였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부터 80대 어르신까지 회원 75명이 있다. 구장은 지하에서 시작했지만, 최근 회원들이 모은 출자금으로 번듯한 운동 공간을 임대했다. 그래서 한림탁구장은 동호회 회원 개개인이 주주고, 관리자가 되는 구조다.
동호회 회원들에게 탁구는 스포츠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특히 탁구를 지역 스포츠로 발전시킨 데 자부심이 크다.
"예전에 우리 동네엔 운동이라는 게 거의 축구, 배드민턴밖에 없었어. 우리가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탁구를 들여오고, 사시사철 운동할 공간을 만들었다는 데 뿌듯함이 있어."
중세 길드에서 시작한 조합식 공유경제
한림탁구동호회는 2년에 한 번 투표로 임원을 선출하고, 연초에 총회를 열어 구장 운영 방안을 논의한다. 이런 조합식 운영은 회원들에게 주인의식을 일깨워 줬다. 한림탁구동호회 홍성의 코치는 "여기는 회원비를 공동으로 모아 운영하는 조직이라서 주인이나 관장이 따로 없다"며 "이곳의 주인은 우리 개개인이기 때문에 조직 운영부터 구장 관리, 행사 기획까지 함께 한다"고 말했다.
조합식 공유경제는 서양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중세 시대 평민들은 집에 빵을 굽는 화덕은 물론 부엌조차 없었다고 한다. 영주들이 개인 화덕 사용을 금지했다. 결국 마을마다 공동 화덕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 문화가 직업별 모임인 '길드(Guild)'로 발전했다. 이후 직업인끼리 정보와 이익을 나누는 조직으로 변화했는데, 대표적으로 미국의 오렌지 생산자들이 모여 만든 '썬키스트'와 축구 팬이 합심해 결성한 'FC바르셀로나', 프랑스의 대형 은행 '크레디아그리콜'도 그렇게 출발했다.
한국공유경제협회 류지웅 사무국장은 "화덕이나 길드에서 볼 수 있던 공동체 정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물세 살짜리 청년 끼아라 루빅이 친구들과 함께 벌인 뜻깊은 운동에서 두드러졌다"라고 전했다. 루빅은 이탈리아 트렌토 시가 폭격에 휩싸였을 때 '서로 간 사랑과 대화를 통한 일치'를 추구하자는 목적에서 '포콜라레 영성 운동'을 창설했다. 류 국장은 이탈리아어로 '벽난로'를 뜻하는 포콜라레(Focolare) 운동이 공유경제의 시초라고 봤다.
'초심자의 날'엔 부담없이 배운다
홍 코치는 탁구를 '가능성의 스포츠'라고 설명했다.
"탁구는 누군가 '고시 공부보다 어렵다'고 얘기할 정도로 하면 할수록 어려워져요.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 성장합니다. 등산엔 정상이 있지만 탁구는 정상이 없지요."
한명희 총무도 탁구의 매력에 푹 빠졌다.
"한 번 발 들이면 뺄 수 없는 게 탁구예요. 진입장벽은 낮은데 점점 벽이 높아지는 듯합니다. 벽을 넘어야 성장하니까 목표 의식이 생겨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지요."
한림탁구동호회는 올해부터 화요일마다 '초심자의 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탁구에 입문한 회원을 위해 상급자들이 자세와 기술을 가르친다. 홍 코치는 "초심자가 들어왔을 때 정착을 돕는 게 기존 회원의 몫"이라며, "집에 손님이 오면 대접하듯 초심자가 탁구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이영화 회원은 초심자의 날이 '회원 간 교류'를 돕는다고 말했다.
"탁구장에 처음 온 사람들은 같이 치자는 말을 꺼내기도 힘들어요. '초심자의 날'을 통해 상급자들과 한 번 치고 나면 안면이 트여 이후 편하게 말할 수 있지요."
고경범 회원은 "처음 구장에 오면 공 줍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진다"며 "누가 같이 쳐준다는 한마디 말에도 굉장히 설레는데 이젠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어서 좋다"고 전했다.
협력적 삶의 방식을 택한 탁구동호회
공유경제의 세계화를 예견한 경제사상가 레이첼 보츠먼은 '협력 소비 형태'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상품-서비스 시스템'은 자동차, 주택 등 개인이 사용하지 않은 소유품을 필요한 사람에게 임대해 부가 수익을 얻는 방식이다. '물물 교환 방식'은 중고 물품을 거래하는 형태다. 무료로 교환하거나 기부하는 등 '당근마켓' 거래가 그 예다. 마지막 '협력적 삶의 방식'은 비슷한 관심과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시간이나 공간, 기술 등의 잠재 자원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한림탁구동호회는 '협력적 삶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예다.
<공유경제> 저자 마화텅은 "공유 경제가 급성장한 국가의 선례를 살펴보면, 공유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기분 좋게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는 공통점이 있다"라고 밝혔다. 한번 공유를 경험하고 다시 참여하는 사람 대다수가 '낯선 사람을 알아가며 교류하는 과정이 즐거워서'라고 한다.
신뢰 회복이 필요한 사회
"인생은 핑퐁이다. 주고받는 것이다. 공이 안 오면 이기는 것이 된다. 그러나 늘 주고받아야 아름다운 인생이 되는 것 아닌가? 인생도 핑퐁도 항상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 이에리사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자
보츠먼은 공유경제의 핵심이 '개인 간 신뢰'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관점으로 신뢰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신뢰가 구축된 상태에서 어떻게 취약성에 대처하거나 낯선 사람을 믿거나 앞으로 나아갈지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저신뢰국가'로 가고 있다. 통계청이 발간한 '국민 삶의 질 2023 보고서'를 보면 대인신뢰도는 2022년 54.6%로 전년보다 4.7%p 감소했다. 코로나19 이전에 70% 내외였으나 전염 우려와 거리두기 등으로 2019년 50.6%로 떨어지고는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하버드대 타룬 칸나 교수는 "'사회적 신뢰'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예측 가능하도록 단순화하고, 새로운 유형의 사회적 협력이 일어나게 한다"라고 강조했다.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려면 의지와 리더십을 발현할 수 있는 시민사회를 조성하는 방법이 있다. 사회적 활동은 개인에게 자기효능감으로 전달되고, 사회 일부로서 기능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은 물론 다른 구성원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탁구동호회의 자치 활동은 구성원들에게 이러한 역할을 했다. 양성혁 회원은 "우리는 자치공동체이다 보니 다른 구장들보다 단합된 모습이 보인다"며, "구장을 관리할 때면 가족들과 집안 청소하는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한림탁구동호회의 매주 수요일 저녁은 '구장 청소 시간'이다. 제시간에 참여하지 못한 회원들은 잠시 탁구장에 들러 탁구대를 닦고, 바닥에 흐트러진 공을 정리하고 갔다. 몇몇 회원은 초심자의 날이 아니라도 자세가 엉성한 초심자의 그립을 고쳐주며 공격에 성공할 때까지 공을 받아줬다.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일상화한 것이다. 이제 탁구장은 매일이 청소의 날이며, 초심자의 날이다. 이들은 탁구 파트너를 넘어 일상을 주고받을 동반자를 찾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