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미국으로 이사할 즈음, 미국 남부 텍사스주 유발데의 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학생 19명과 선생님 2명이 숨진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 큰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희생된 비극적인 참사였기에 이사를 앞두고 마음이 심란했다. 싱가포르인 친구는 총기가 허용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나라로 왜 이사를 가느냐며 나보다 우리 가족을 걱정했다.
미국에 이사를 온 이후에도 총기 사고 뉴스는 끊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메사추세츠 주 인근 메인 주(State of Maine)에서 한 남성이 늦은 저녁 락카페에서 총을 난사하고 95번 국도를 이용해 도주 중이라는 뉴스였다. 95번 국도는 우리 동네를 지나가는 도로여서 범인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기 전까지 범인이 주변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총기 사고는 전쟁이나 물 부족 또는 환경 오염처럼 내 눈앞에서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기에 먼 이야기로 들릴 때가 많았다. 그랬던 총기 사고를 내 두 눈으로 목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총 쏘는 운전자
지난 12일은 아이들 없이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자유 시간이었다. 곧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두 달 넘게 아이들과 함께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보스턴 동쪽 바다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고 갤러리에서 그림을 감상하며 달콤한 자유 시간을 만끽하자며 친구와 보스턴으로 향했다.
보스턴 씨포트(Seaport)는 남쪽 보스턴 해변을 재개발한 지역으로 세련된 레스토랑, 바, 호텔 등이 즐비해 대학들이 밀집한 시내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다. 나에게 씨포트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한강을 배경삼아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는 한남동 또는 여의도 같은 곳이다.
보스턴 씨포트에 들어서자마자 주차장을 찾아 헤맸다. 점심 시간이라 공영 주차장은 만차였고, 주차가 가능하다는 주차장을 간신히 찾아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1층은 역시 만차, 지하 2층으로 들어가기 직전 '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풍선 터지는 소리 들었어? 지하 주차장에서 난데없는 풍선이라니, 생뚱맞다. 그렇지?"
친구와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지하 2층으로 내려가기 직전, 주차 구역을 빠져나가려는 차 한 대를 봤고, 그 차가 나가면 바로 주차할 수 있겠다며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이었다. 주차 구역에서 차를 빼던 운전자가 차창 밖으로 손을 한껏 뻗고는 총을 쏘기 시작했다.
'뻥, 뻥.'
좀 전에 풍선 터지는 소리라 여겼던 그 소리와 같았다. 운전자가 차창 밖에 내민 권총의 총구에서 스파크가 일어났고, 새하얀 가루가 흩날렸다. 영화에서나 봤던 장면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순간 온몸이 얼었고 그 어떤 소리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주차 구역을 빠져나오며 총을 쏜 운전자의 차는 나와 내 친구가 타고 있는 차를 향해 다가왔다. 그 순간 나는 무의식중에 의자 아래로 몸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운전석에 앉은 친구의 팔을 잡아당기며 최대한 몸을 낮춰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몸을 좌석 아래에 구겨 넣으며 백지 상태가 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저 사람이 우릴 보고 총을 쏘면 안 되는데, 절대 안 돼, 우리에게 총을 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
차의 사이드미러가 부딪히지 않을 정도의 간격으로 총격자의 차가 스쳐 지나갔다. 머리만 숨기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을 거라며 이불 속에 얼굴을 숨기던 아이의 모습이 바로 나였다.
총격자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큰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을 들어 총격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일 따위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코를 막고 숨을 참고 있으면 사람을 찾을 수 없는 강시가 내 곁을 서성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살고 싶었다
총격자의 차가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던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흘러갔다. 보조석 사이드 미러로 총격자의 차 뒷모습이 보이자 나와 친구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봤다. 둘 다 사시나무 떨듯 와들와들 떨고 있었고, 곧 눈물이 터질 듯했다. 지하라 그런지 911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지하 주차장에 갇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며 주차장부터 빠져나가자고 했다.
911에 전화했다
어여쁜 초여름 햇살은 변함이 없었다. 나와 친구는 지하 주차장에서 겪은 단 5분의 충격으로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길가에 주차를 해두고 911에 전화를 했고, 우리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앰뷸런스 2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고, 우리가 빠져나온 주차장 인근 도로에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설치되는 중이었다. 911 신고를 마친 나와 친구는 벌건 대낮에 총격 사건이 일어난 도시를 떠나 고요한 시골 동네인 우리 동네로 가자며 서둘러 차를 돌렸다. 빌딩 숲속을 한 블럭 이동했을 뿐인데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 표정이 평온해 보였다. 어째서 우리는 이 평온한 점심시간에 총격자와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것일까.
친구가 운전해 가는 동안 뉴스를 검색했다. 우리가 방문한 씨포트에 위치한 갤러리에서 보스턴 소재 고등학교의 졸업식 행사가 있었다. 총에 맞은 여성은 졸업식에 참석했던 18살 졸업반 학생이었다. 사건이 있었던 직후 병원에 이송되어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고, 총격자는 도주했다.
"보민,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총을 본 일은 처음이야. 이렇게 고급스러운 동네에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 총에 맞다니, 이런 비극이 이 나라 말고 또 있을까?"
총기 소지가 합법인 나라가 미국이고, 크고 작은 총기 사고가 수시로 일어나는 곳이지만 내 눈앞에서 이런 일이 펼쳐질 것이라 상상을 못 했다. '총기 사건'은 중동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나 북극의 얼음이 녹는다는 뉴스를 읽는 것처럼 나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비극적이지만 나에게 만큼은 현실적이지 않은 뉴스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일렀다
드디어 고요한 우리 동네에 도착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온몸으로 안으니 내가 여전히 현실에 존재한다는 게 실감 났다. 너무 구체적이지 않은 정도로 보스턴에서 내가 겪은 일을 아이들에게 알려줬다.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듯, 엄마가 총을 봤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아이들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몸을 낮추고 빠르게 움직여야 해. 몸을 낮추는 게 중요해. 알겠지?"
아이들이 이 조언을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많이 놀란 나를 위로해 주며 안아줬다. 다시 한 번 아이들을 속으로 읊조렸다.
"엄마가 아무 일도 없이 이렇게 집에 돌아와서 너희를 안을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지난 지금, 가끔 아이들은 총을 쏜 범인이 잡혔냐고 물어본다. 치료를 마친 피해자가 병원에서 퇴원했다는 기사만 있을 뿐 범인이 체포되었다는 기사는 아직 없다.
계획했던 바는 실행하지 못했고, 계획에도 없었던 일은 일상에 깊게 들어왔다. 어차피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면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일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내야겠다 싶다. 대낮에 점심 먹으러 나선 길에 총격 장면을 목격하고, 총격자와 같은 공간에 머물렀던 그 순간, 다시 태어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