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어무이 딸들인교?"
택시 기사님의 구수한 사투리가 정겹다. 엄마의 생일을 맞아 세 딸이 모였다. 지난 1일, 쇼핑몰에서 엄마에게 잘 어울리는 블라우스와 바지를 사고 공연장으로 이동하던 길이었다.
"예, 다 내 딸들입니더."
"아이고, 딸부자시네요. 복 받으셨다! 너무 보기 좋네예."
넉살 좋은 기사님은 룸미러를 보며 뒷좌석에 탄 엄마에게 연신 말을 건넸다. 정신없는 손주들과 백년손님 사위도 없이 오랜만에 당신 딸들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엄마에게도 꽤 만족스러운 듯했다.
6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180도 변한 엄마의 삶은 절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편마비와 언어장애가 온 엄마는,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는 스스로 고립을 자처해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기력과 만성 우울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이날, 택시 기사님의 너스레에 웃을 일이 많지 않은 엄마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귓가를 두드리는 투박한 사투리에 내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대구를 떠나 경기도에 머무른 지도 10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주민으로 살고 있다. 폐쇄적인 시골 동네에 집을 지으며 원주민들 사이에서 늘 겉도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쩌면 타향살이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외로움과 공허함은 이제 착실히 새겨진 흉터처럼 익숙하다.
제아무리 몇 시간이면 고속열차를 타고 어디든 다녀갈 수 있는 반나절 생활권이라지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더라. 몇 번만 장거리를 다녀오면 녹초가 된다. 물리적 거리만큼 부모형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누가 보면 아주 먼 외국에서 향수병이라도 걸린 줄 알겠다. 기사님의 사투리가 쏘아 올린 포근함은 과거 내 호기로운 선택에 대한 후회와 미련으로 이어진다.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골든걸스 대구 콘서트'를 보기 위해 경북대 대강당으로 향했다. 들어가기 전 포토존에서 익살스러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주변을 보니 할머니를 모시고 온 착한 손녀딸도 보이고, 손을 꼭 잡은 중년의 부부, 우리처럼 엄마와 딸도 있었다.
요즘 걸그룹은 모르지만 인순이와 이은미는 아는 엄마다. 불혹을 넘긴 나도, 이제는 아이돌 뉴진스 보다 박미경의 노래가 더 편안하게 느껴진다.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수순이다.
화려한 조명과 함께 번쩍이는 무대 위에서 검은색 의상의 멋진 '언니들'이 등장했다. 무대를 여는 첫 번째 곡은 < THE MOMENT >였다.
진한 화장과 의상의 효과였을까? 평균 나이 60.5세라는 그녀들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젊고 아름다웠다. 잔잔한 발라드와 파워풀한 댄스곡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언니들은 방송에서 선보였던 미션곡과 각자의 솔로곡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도전정신이 빛나는 아이돌 곡을 부르는 것도 놀라웠지만, 개인적으로는 명불허전 본인들의 곡을 부르는 게 더 좋았다. 입이 떡 벌어지고 귀가 호강하는 순간이다. 콘서트를 다녀온 뒤 출퇴근길, 프로그램에서 '은쪽이' 별명이 붙었던 이은미 노래를 몇 주 내내 얼마나 들었는지 모른다(그녀는 방송에서 힘들어서 체중이 빠져 노래하기 버겁다며 투덜대곤 해 '은쪽이'로 불렸다).
방송을 모두 챙겨보지 않았지만, 기사와 영상을 통해 골든걸스 이슈를 접했다. KBS 예능 <골든걸스>는, 인순이와 박미경, 이은미와 신효범 등 가수 4인이 박진영의 프로듀싱과 함께 그룹으로 활동하는 여정을 그린 프로그램이다. 작년 10월 시작해 지난 1월 방영이 끝났다. 실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폭발적인 무대는 방송의 몇 배에 달하는 감동을 주었다.
인순이가 부르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듣다가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서른을 한참 지났지만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애잔하게 다가온다. 옆에 앉은 엄마에게 들킬까 부끄러워 얼른 눈물을 훔쳤다. 배우 전미도가 드라마에서 불러 전미도의 곡인 줄만 알았던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는, 2006년 신효범이 부른 노래였다.
한국의 휘트니 휴스턴이라 불리는 원곡자의 위엄이 느껴졌다. 엄마와 여동생의 손을 꼭 잡고 리듬에 맞춰 천천히 팔을 흔들었다. 신효범이 자신만의 색깔로 소화한 트와이스의 '필 스페셜'(Feel Special) 또한 여운이 남았다.
숨이 턱까지 찬 채 노래를 마친 그녀는 가사가 정말 멋지지 않냐고 읊조렸다. 팬들이 있어 자신이 존재한다는 말을, 가사를 빌려 대신하는 듯했다.
"세상이 아무리 날 주저앉혀도
아프고 아픈 말들이 날 찔러도
네가 있어 난 다시 웃어
That's what you do
Again I feel special"
애플워치의 소음 경고... 지금 뭣이 중헌디
인순이가 부르는 <친구여>, 박미경의 <이브의 경고>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고, 떼창을 했다. 할 수는 있지만, 일어나지 않겠다는 엄마를 설득하고 일으켜 세워 함께 춤을 추고 몸을 흔들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엄마의 얼굴을 보니, 아프기 전 누구보다 활력 넘치던 예전의 엄마가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애플워치에서 소음레벨이 100dB에 다다랐다고 계속 알람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뭣이 중헌디? 청력에 손상이 갈 수 있다는 알람을 무시하며 다같이 소리를 지르고 즐겼다.
무뚝뚝하고 호응 안 하기로 유명한 대구 사람들이지만, 이날만큼은 관객 모두가 온몸으로 반응했다. 전성기를 지나 대중에게 잊히다 다시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은 그녀들의 벅찬 감정과 설렘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함께 울고 웃는 콘서트였다.
전국투어 콘서트는 22일 서울 앙코르 공연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골든걸스에서 다시 본인들의 자리로 돌아가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녀들의 도전은 향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자연스럽게 열정이 식었고, 뭔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거나 시도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곤 했다. 그녀들이라고 쉬웠을까? 아직은 죽지 않았다고,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는 무대를 보며 울컥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움츠린 어깨를 펴고 나도 한 발짝 떼어 볼 참이다.
공연이 끝나고 상기된 얼굴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는 말없이 환하게 웃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디바들이 전하는 묵직한 메시지가 일흔세 번째 생일을 맞은 엄마에게도 전해졌기를 조용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