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국회가 개원했습니다.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 한 표를 읍소하며 당선된 300명의 국회의원이 과연 유권자를 위해 제대로 일하는지 지켜보고 감시해야 할 때입니다.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데 안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지니까요.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는 칼럼을 통해 유권자의 시각에서 22대 국회와 정치를 비평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꺾’이지 않는 ‘정’치개혁이니까요. [기자말] |
새 국회가 임기를 시작하면 국회는 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을 선출하고 각 상임위원회에 위원을 선임하면서 국회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틀을 갖춘다. 이것을 원구성이라 한다. 국회법만 보면 원구성 절차에는 어려울 것이 없다. 원구성에 관련된 법조항에 특별한 것은 없다.
국회법 15조는 의장단을 무기명투표로 뽑는다고 정하고 있다. 국회법은 의장단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득표로 당선되고, 과반수의 득표자가 없을 경우에는 2차 투표를 실시하고 그래도 과반투표자가 없으면 최고득표자에 대하여 결선투표를 한다고 정하고 있을 뿐이다. 상임위원장의 선출도 국회 본회의에서 재적의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다수득표자를 당선자로 한다고 정하고 있는 것이 전부다. 법적으로는 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을 뽑는 절차는 이토록 간단한데 왜 원구성은 이토록 어려운가?
한국 국회는 제헌국회부터 민주화 이전 마지막 국회인 12대 국회까지 '법대로' 상임위원장을 선출했기 때문에 과반을 차지한 정당이 거의 모든 경우에 의장단과 상임위원장직을 독식했다. 상황이 바뀐 건 13대 국회에서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지만 1988년에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정의당은 125석의 의석으로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했지만 김대중의 평화민주당과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131석을 얻으면서 여소야대 국회가 구성됐다.
노태우 정부와 민정당은 야당의 협조 없이는 국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고 야권은 상임위원장직을 야당에게도 배분할 것을 요구했다. 여당은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원구성에서 여야의 균형을 고려하는 관행이 시작됐다. 법대로만 한다면 구태여 소수당인 야당에게 상임위원장 자리를 내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국정을 정상화하려면 정부와 여당은 반대파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고 그들과의 공존을 모색해야만 했다.
상임위원회를 의석비율에 따라 배분하는 합의제적 국회운영의 전통은 21대 국회 전반기에 깨졌다. 대통령선거, 지방선거, 국회의원선거에 연달아 대승을 거둔 민주당은 대선, 지선, 총선에서 연달아 표출된 민심을 받들어야 한다며 상임위원장직을 독식했고 당시 야당인 미래통합당은 민주당이 국회의 합의제적 전통을 깼다며 비판했다. 21대 국회 후반기에 와서는 다시 상임위원장직을 의석비율대로 배분하는 전통이 되살아나는 듯했으나 이번 22대 국회 전반기 원구성에서 다시 21대 전반기의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다수제적 모델과 협의제적 모델
상임위원장직을 국회 다수당이 독식하는 것이 정당한가? 아니면 국회 의석비율에 따라 상임위원장직을 배분해야 하는가? 사실 어느 쪽이든 정당화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상임위원장직을 국회 다수당이 독점하는 다수제적 모델은 의회 운영의 정치적 책임이 어느 정당에 있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해준다. 특정 정당이 국회운영의 주도권을 전적으로 가졌다면 그 국회에서 잘된 일도, 잘못된 일도 모두 그들의 업적과 실책으로 돌릴 수 있다. 국회의 운영에 관련된 권한을 독점했으니 남 탓은 부끄러운 일이다.
상임위원장직을 의석비율에 따라 나누는 협의제적 모델은 투표로 표현된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를 국회운영에도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예를 들어, 151대 149가 된 국회에서 151이 된 정당이 '법대로' 모든 상임위를 독차지한다면 실질적인 국회운영에서의 권한은 단 두석이 많은 정당이 독점하게 되는데 협의제적 모델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국회 운영에 관련된 다양한 권한은 151석을 가진 정당과 149석을 가진 정당이 비슷하게 나누어 갖는다.
반복되는 원구성의 난맥상은 원구성을 뒷받침하는 제도와 관행이 그 기초가 되어야 할 원칙에 대한 고민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회운영에 책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권력을 공유하고 여야가 협치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하면 된다. 문제는 제도와 관행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그 제도와 관행이 기초하는 원칙에 대한 지지와 합의가 존재해야 하는데 그런 합의도, 아니 애초에 원칙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다.
양당은 국회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할 것인지, 입법부와 행정부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화 되어야 할지, 정치과정 전반에서 정부 또는 의회 다수파의 책임성을 강조할 것인지, 아니면 비례성, 대표성, 권력공유를 강조할 것인지와 같은 근본적인 정치의 원칙에 관한 논쟁 없이 그저 단기적 상황에 따라 자신들에게 필요한 논리를 끌어다가 자기 정파의 단기적 이익을 실현하는데 쓰기 바쁘다. 집권당이 되면 국정운영의 중심은 대통령이니 국회는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 협조하라고 요구하던 사람들이 야당이 되면 갑자기 의회주의자로 돌변해서 진정한 민의의 전당은 의회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의회에서 다수파가 되면 '민주주의의 의사결정 방식은 다수결'이라며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반대파는 모조리 '발목잡기만 일삼는 세력'으로 몰아세우던 사람들이 소수파가 되면 드디어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인지 '정치의 본질은 대화와 타협'이라거나 '소수의 의견도 소중히 다뤄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좋은 정치란 그때그때 다르다. 그때는 맞던 이야기도 지금은 틀리다고 우긴다. 이 말이 와닿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유튜브에 가서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청문회 영상을 찾아보자. 당시에 쓰여진 댓글도 같이 보면 좋다. 이 나라 정치가 왜 이 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원칙에 합의했다면
상임위원장을 다수당, 또는 여당이 독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본인이 소수당 또는 야당이 되었을 때에도 상대 정파가 모든 상임위원장직을 독점해도 좋다는 원칙에 동의해라. 의석비율에 따라 상임위원장을 배분하고 소수파 또는 야당에게 다수파나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자신들이 다수파가 되었을 때에도 소수파가 자신을 견제할 권력을 가지는 상황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라.
어떤 원칙에 합의하든 그 원칙이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때도, 유리하게 작용할 때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복잡할 것이 없다. 무려 정치가 직업이라는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원칙도, 이념도, 이상향도 없이 아무 말이나 뱉어내는 부끄러움을 미래의 자신들의 몫으로 맡겨두고 있으니 간단한 일이 어려울 수밖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박영득 충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작성했습니다. 참여연대 홈페이지와 슬로우뉴스에도 중복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