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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아름다운 마을이 참 많이 있다. 청산도의 상서마을도 그중에 하나이다. 상서마을의 '덜리'는 청주한씨(淸州韓氏)들이 청산도에 최초로 입도하여 정착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 완도신문
 
ⓒ 완도신문

덜리는 청산도의 주산인 매봉산(鷹峰山)이 뒤를 감싸고 있어 땔감과 물이 풍부하고 땅의 경사가 완만하여 사람이 거주하기에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매봉산의 한자어는 응봉산이다, 응봉산의 응자가 매 응(鷹)자이다.

그래서 청산도는 이 산 이름 때문인지 지금까지 전설처럼 꿩이 살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덜리에는 상서마을 구들장논의 수원(水源)이 발원(發源)하고 있어 주민들은 이 물로 구들장 논의 수로(水路) 시스템을 이용하여 논농사를 짓고 있다.

상서마을에서 구들장이 놓이고 물이 나오는 이런 논을 '수문배미'라 부른다. 수문배미 옆에는 반드시 '옹살이'가 있는데 이는 수문배미에 딸린 보조 논으로 수량을 조절한다. 상서마을은 논농사에서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아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긴꼬리투구새우가 서식하고 봄·가을이면 반딧불이가 밤의 향연을 펼치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또 마을의 구속구석을 잇는 골목길은 강담(돌담에 바람이 통하게 흙을 사용하지 않고 돌만으로 쌓은 담)으로 지난 2006년에 등록문화재 279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지난 2009년에는 환경부가 선정하는 자연생태우수마을로 지정됐고, 2014년에는 환경부가 또 다시 환경이 살아있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품마을로 선정했다. 

이곳 상서마을에도 청산도 각 마을의 사장나무로 많이 심어진 팽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실 이 나무는 수령이 100년을 조금 넘은 팽나무로서는 어린나무이다. 

수고와 수폭이 각 10여m, 흉고둘레는 2.8m로 수형이 잘 갖춰진 매우 아름다운 나무였는데 지금은 분재가 되어 있다. 말 못한 나무의 목을 쳐버렸기 때문이다. 원래는 이 나무 옆에 흉고둘레가 10m 쯤 되는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50년대 태풍에 넘어져서 고사되었다.

오늘날의 팽나무는 느티나무가 죽고 그 대체목으로 바로 옆에 심어졌다. 나무의 표석에는 1954년 4월 5일 식목일날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나무를 직접 심은 지형국옹은 1957·8년경 봄에 마을의 청년들이 매봉산의 후사면에서 세그루의 팽나무를 캐 왔다고 한다. 그중 두 그루는 이식 후 고사하고 한그루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서 몇 해 전까지 상서마을 주민들의 사랑방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 완도신문

당시 나무를 굴취하여 심었다는 지형국(90. 청산면 상서리)옹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만 하드라도 사장나무가 없는 것은 마을의 챙피한 일이었어요. 태풍으로 느티나무가 쓰러져서 죽어부렇어요."

"그래서 마을의 청년들이 죽어 버린 느티나무 대신에 팽나무를 심자고 하고 매봉산 뒤쪽에서 팽나무를 세그루 캤어요. 그란디 문제는 어찌게 마을까지 가져오냐가 문제였어요. 그때만 하드라도 전부다 지게질을 할 때라 그 무건놈을 지게에다 번갈라감서 지고 싯거리재(마을의 뒤쪽에 있는 재(峙)로 마을에서 이 재를 넘으면 상서마을 바다인 큰기미에 다다르는 지름길이다)를 넘어서 왔어요."

"그때 나무 크기가 이상 컷는디 퉁겁기는 우리 다리통보다 쪼간 더 가늘었어요. 그래도 쌩나무라 징하게 무괐는디 다행히 잘 가져와서 나무를 심고 물도 주고 비료도 주고 해서 1년간 지극 정성으로 키우다가 군대에 갔다오니 다행히 잘 살아있어서 참 기뻣습니다."


60여 성상의 세월동안 자신이 심은 나무가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으니 감회가 새로웠는지 지형국옹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런데 이 역사성을 가진 상서마을의 팽나무가 누군가의 무지로 인해 몇 해 전 목 잘림을 당하였다. 지금은 사장나무가 아니라 한 그루의 분재가 되어있다. 그 이유를 몇 해 전 마을의 지도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왜 마을의 사장나무에 목치기를 하였는지를, 상서마을은 명품마을이자 슬로시티 청산도의 중간기착지로 수많은 걷기 여행자들이 필수 코스로 들리는 마을이다. 그런 마을의 시원한 그늘을 단칼에 없애버린 사람은 응당 책임을 져야 할 것이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 완도신문

김주찬(89. 상서마을 노인회장, 사진)옹의 증언.

"내가 청년 때 군대 가기 전이었어, 태풍으로 마을의 느티나무 쓰러져서 죽었는디 아마 완도군에서는 질 큰놈이었을 것이요, 우리가 닷섯이가 보듬마사 딱 보듬을 수가 있어 그라고 컷어 태풍으로 쓰러지기 전에 그 나무가 썩어서 속이 텅 비었었거등 껍데기만 남었어 그랑께 애기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막 놀아.″

″그때는 마을이 크고 청년들도 무지 많앴어요, 그래서 사장나무를 다시 심겠는디 우리 동네 사장나무는 말 그대로 동내 사랑방이었어요. 여름이먼 아침밥만 묵으먼 전부다 사장나무 밑으로 다 모테, 100%는 아니어도 99%가 모텐다고 보먼되아. 쩌그 덜리 논에 댕게오다가도 꼭 사장나무를 지께야돼, 사장나무가 마을의 모든 정보가 통하는 곳이여, 그랑께 사장에만 가먼 누구집 숫꾸락이 몇 갠지, 누구집이 애기를 낳는디 아들인지 딸인지, 동네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은 다 알어부러, 그랑께 안 들릴수가 없제.″   


상서마을은 청산도에서도 역사가 가장 깊은 마을이다. 기록에 의하면 숙종(1661 ~ 1720)때 상서마을은 사정리(射亭里)였다고 한다. 말 그대로 화살을 쏘는 정자가 있었다는 곳이다. 마을 앞 산이 남산(南山)인데 지금도 당시에 과녁으로 사용됐던 바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상서마을의 수 십년 역사를 간직한 팽나무가 지금부터라도 주민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아픈 과거를 잊고 다시 한번 웅비의 나래를 펼 수 있는 노거수가 되기를 기원하며 펜을 놓는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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