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황성옛터'라는 노래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레코드판을 좋아하는 음악애호가라면 일제강점기 때 이름을 날렸던 가수 이애리수가 가녀린 목소리로 부르는 '황성옛터'를 기억하고 있다. 또 가수 남인수를 떠올린다면 '황성옛터'가 가장 먼저 기억될 것이다.
황성옛터는 1908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연기와 공연기획, 운영, 악극단 효과 방법 등을 배우고 활동한 왕평(본명 이응호)이 작사한 노래이다.
왕평의 나이 20세이던 1928년 극단 '조선연극사'의 순회공연 중 전수린이 개성 만월대에서 느낀 감회를 먼저 멜로디로 만들었고 왕평이 작사했다. 이 노래는 가수 이애리수가 불렀다. 1932년 4월 레코드로 출반되었고 당시 5만 장이라는 판매기록을 남겼다.
'황성옛터'는 망국의 서러움과 상처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우리 민족의 비장한 한의 정서가 그대로 묻어나는 가사로 이 노래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불리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 곡을 금지시키고 부르는 조선인을 처벌했으나 금지곡이 되면서 더욱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왕평은 1930년대 악극 활동과 난센스, 만담 등의 대본을 쓰고 직접 출연하면서 이름을 날렸으나 1940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연극 '남매'를 공연하던 도중 무대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는 연극으로 시작해 레코드 음반 발매, 만담 대본 쓰기와 직접 출연해 100여 곡의 가사 쓰기, 신진가수 발굴, 영화배우 출연, 유랑극단 무대행사의 기획과 책임자로 초창기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왕평이 사망한 후 1941년 그를 추모하는 노래 '오호라 왕평(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남인수 노래)'이 발표되었고 1996년부터 그의 고향인 영천에서 '왕평가요제'가 열리고 있다.
이동순 교수 <나는 왕평이다> 출간 "고품격의 시인이자 대중문화인"
시인이자 가요사 연구가로 널리 알려진 이동순 교수(영남대 명예교수)가 우리나라 초창기 가요와 신파극 등 대중문화를 이끈 왕평의 생애와 활동, 민족사적 의의를 밝힌 <나는 왕평이다>를 냈다.
이 책은 왕평의 생애와 작품을 본인이 직접 집필한 회고록 형식으로 쓰여 마치 자서전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첫 장 '나는 왕평 이응호다'는 "내 이름만 갖고는 나를 친숙히 알아볼 독자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나는 '민족의 노래'로 일컬어지는 '황성옛터'의 작사가다"로 시작한다.
또 '후회스러운 영화 '군용열차' 출연'에서는 자신이 영화에 출연하게 된 계기 등을 적으면서 "지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이 영화에 내가 출연했던 것은 처음부터 잘못이었다"며 "절대로 출연해서는 안 될 군국주의를 선전하는 영화에 경솔하게 출연해 내 삶에 오점을 남겼다"고 반성하기도 한다.
"나라 잃은 시대, 나는 민족 저항의 노래인 '황성옛터' 한 곡으로 겨레의 영혼에 불을 지폈다. 그 불이 꺼지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그 불꽃은 꺼졌는가? 여전히 활활 타고 있는가?"
이동순 교수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왕평은 민족의 노래 '황성옛터'의 가요시를 써서 고통 받던 겨레의 제단에 바친 고품격의 시인이자 대중문화인"이라며 "1920년대 카프 시인들이 이 노래를 울면서 합창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책에서 "왕평의 대중문화운동은 오로지 일제 식민 치하 우리 민족 대중의 심리적 피로와 고통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관된 신념 아래 펼쳐졌다"며 "황성옛터는 당시 망국의 서러움과 상처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우리 민족의 비장한 한의 정서가 그대로 묻어나고 있다"고 했다.
왕평의 책 출간을 기념해 오는 7월 1일 경북 청송 파천의 왕평 묘소에서 헌정식이 진행된다. 이날 헌정식에서는 <나는 왕평이다> 발간의 경과를 소개하고 이동순 교수의 집필 소감과 함께 책을 헌정한다.
한편 도서출판 일송북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만든 인물들을 통해 삶의 지혜와 미래의 길을 열기 위한 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한국 인물 500인' 시리즈 <나는 OO이다> 프로젝트를 출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