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1년 2월 14일에 본지의 보도 '
화성 태봉산에는 융릉과 관련한 비석이 있다?'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는 외금양계비는 당시 비지정 문화유산으로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보호와 관심이 필요함을 촉구한 바 있다. 이후 외금양계비는 비지정 문화유산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2023년 8월 22일에 화성시 향토유적(유형문화재 제23호)으로 지정, 공적인 보호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외금양계비(外禁養界碑)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과 정남면에 걸쳐 있는 태봉산에 세워진 금표로, 화강암 재질인 표석의 전면에 외금양계(外禁養界)가 새겨져 있다. 지난 2004년에 처음으로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현륭원(顯隆園, 융릉)과 건릉(健陵)의 외금양에 속했던 태봉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웠다. 당시 외금양에 속한 산의 경우 수목을 보호하기 위해 벌채나 개간, 가축을 기르는 행위 등을 금지했는데, 해당 표석은 이를 잘 보여주는 흔적인 셈이다.
실제 <정조실록>과 <일성록> 등에는 당시 왕들이 외금양에 속한 산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나무를 심고,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펼쳐 왔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당시 외금양계비가 세워진 태봉산은 현륭원(顯隆園, 융릉)의 외금양에 속했음에도 사실상 황폐화되어 있었고, 이에 정조는 홍범산의 사례를 언급하며, 태봉산 숲이 울창해지려면 얼마 정도 걸릴지 물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외금양계비는 조선 후기 산림 행정 자료로도 의미가 있다.
또한, 외금양계비는 당시 외금양의 규모와 경계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해당 표석이 세워진 배경은 1798년(정조 22) 태봉산(台峯山) 아래 마을에 사는 신광린(申光隣)의 정소(呈訴)로부터 시작된다. 해당 정소에서 신광린은 백성들이 태봉산을 지속적으로 범하고 있어 숲이 울창해지기 어렵다며 해법으로 마을에서 계(契)를 만들어 이를 관리하게 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관에서 징계와 처벌을 해서 실효성을 담보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정소를 현륭원 영(顯隆園令) 서직수(徐直修)가 장용대장 조심태(趙心泰)에게 이야기했고, 조심태가 정조에게 보고했다. 조심태는 외금양의 관리를 동계 조직에만 맡기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언급한 뒤 산허리 아래 금표와 표석을 세울 것을 이야기했고, 정조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외금양계비가 세워졌다. 이러한 내용은 <일성록>과 <승정원일기>를 통해 교차 검증이 된다.
한편, <일성록>과 <승정원일기>를 통해 추가적인 정보가 확인되는데, 1798년에 세운 표석이 1개가 아닌 4개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1823년(순조 23) 2월 7일에 올라온 수원유수(水原留守) 이희갑(李羲甲)의 장계를 통해 알 수 있다. 해당 장계의 주요 내용은 건릉과 현륭원의 외금양인 태봉산의 남쪽 기슭 아래 거주하는 신광린(申光隣)이 불법적으로 토지를 점거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이희갑이 현장을 확인한 뒤 신광린을 옥에 가두고, 고문을 가한 뒤 귀양을 보냈다.
또한, 관리‧감독을 소홀히 혐의로 건릉(健陵)의 전(前) 수릉관(守陵官)인 남연군과 건릉 영 유간(柳諫)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죄상을 알리고, 담당 관사로 하여금 임금에게 물어 처리할 것을 장계에 담았다. 이에 순조는 장계대로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이희갑의 장계에 태봉산에 세워진 표석이 1개 아님을 알 수 있는데, 그가 직접 태봉산을 다녀온 뒤 태봉산 남쪽과 북쪽에 표석이 있다고 장계에 언급하고 있다. 이희갑은 남쪽 표석이 황곡리(黃谷里) 고개 앞에 있고 북쪽 표석은 노리(老里) 언덕 앞에 있다고 했는데, 이 중 노리 언덕은 노리 고개(화성시 봉담읍 분천리)로, 황곡리 고개는 항골(화성시 정남면 관항리)로 추정된다. 이 경우 현재 남아 있는 외금양계비는 동쪽에 세워진 표석으로 볼 수 있다.
실제 건릉(健陵)의 전(前) 수릉관(守陵官)인 남연군과 건릉 영 유간(柳諫)이 자신들을 변호하기 위해 쓴 원정(原情) 기록을 통해 위의 사실이 입증된다. 해당 기록을 통해 남연군은 태봉(台峯)의 뒤쪽 표석에 '外禁養定界'가 새겨진 사실을 언급했으며, 유간은 태봉산에 4개의 석표가 세워진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태봉산을 중심으로 사방의 경계에 표석을 세운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위의 기록과 현장에 세워진 외금양계비를 통해 서쪽을 제외한 표석들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외금양계비는 현재까지 왕릉에 세워진 금표(禁標)로는 유일하게 실물이 남아 있는 사례로, 희귀한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외금양계비가 보호될 수 있었던 건 비지정 문화유산임에도 그 가치를 주목하고 지속적으로 현장을 찾아 정화 활동 및 모니터링을 실시한 국가유산지킴이들의 보호 활동과 관련 연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와 더불어 적극적인 민관협력이 이루어진 결과 외금양계비는 향토유적으로 지정, 공적인 보호의 영역으로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국가유산지킴이들의 역할이 단순히 정화 활동과 모니터링에만 그쳐서는 안 되며, 연구와 홍보 등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문화유산의 가치 찾아가는 데 있어 역할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민관협력을 통해 문화유산 지정 및 공적인 보호의 영역 안으로 포함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인 동시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