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말기는 이념적으로 몇 갈래로 나뉘지만 여전히 정학(正學)이라 불리는 주자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청국을 통해 서학이 들어오면서 주자학은 도전을 받았다. 오랜 세월 주자학은 형식논리에 빠져들고 허례허식이 본질처럼 굳어졌다. 개신유학·양명학이 지행합일을 내세워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5백년의 뿌리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근대 한국사상사에서 가장 유력하였던 사상조류로서는 위정척사사상이 있었다. 본래 위정척사사상은 근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5백여 년간에 걸친 조선 유교의 특질을 규정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중국이나 일본의 유교와 비교할 경우), 1392년의 고려에서 조선에로의 왕조 교체는, 건국이념에 있어서 불교에서 숭유에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이조 5백여 년간, 정학=공·맹·정·주(그 집대성으로서의 주자학)의 '도통(道通)'을 유일사상으로 하고, 사학(邪學)=불교·도교·육왕학·서학(천주교)에 대한 가혹한 반이단 투쟁이 계속되었다. 말하자면 위정척사사상은 정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순결성, 그 유일성을 고수하기 위한 사상적 무기였다. 조선조 유교의 특징을 추려내면, 정통과 이단과의 엄격한 구별과 반이단 투쟁에 의한 사상적 일관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19세기말 조선사회는 주자학과 양명학,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동학과 천주교가 난립하는 과도기 형세를 띠었다. 좋은 의미에서 주자학 일극체제에서 다양성으로 전환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서세동점의 시국에 국론이 분열하는, 각자도생의 혼란기였다.
우리가 여기서 탐구하고자 하는 면암 최익현은 위정척사파(爲正斥邪派)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말 위기의식에서 형성된 위정척사사상은 원래 화이의식(華夷意識)을 기초로 하고 있었으므로, 배타적·보수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변천하는 한말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심화발전시켰다. 즉 외압의 위협에서 민족의 자존의식이 발생했고, 그 의식이 점차 민족의 자주의식으로 의식화되어 민족주의 사상으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주석 2)
'위정척사'란 말은 '정(正)'을 지키고, '사(邪)'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본래의 의미가 이러한 데도 한말의 위정척사파는 급변하는 세계사의 조류에 역행하는 폐쇄적인 수구세력의 정치적 집단으로 낙인될 만큼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그러한 측면도 없지 않았고, 이들이 끼친 반시대적 악영향은 조선왕조의 몰락을 가져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위정척사파는 부정적인, 반동수구파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었다.
따지고 보면 양명학 계열에도 반동수구가 있었고, 개화파 중에도 유사한 인물이 있었듯이, 위정척사파에는 전제권력의 비판과 일제에 피의 항쟁에 나선 인물이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양명학자와 개화파 지식인들이 하지 못한 역할도 하였다.
그 중심인물이 화서학파와 면암 최익현이다.
"화서학파에 속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이 시대 속에서 도학정신을 가장 격렬하게 발휘하였지만, 특히 면암은 화서학파의 여러 인물들 가운데서도 도학이념을 가장 뚜렷하게 시대의식으로 구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면암의 활동과 사상은 화서학파의 역사인식과 시대의식이 지닌 특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좋은 사례인 것이다." (주석 3)
한 연구자는 면암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변동과 그의 활동 양상에 따라 크게 4시기로 구분하였다.
(1) 22세까지 초년 시기는 화서 이항로 문하에서 학업을 연마하던 수학기요.
(2) 과거에 급제한 23세부터 40세까지 장년 시기는 비교적 조용하게 벼슬길에 나가있던 사환기이며,
(3) 대원군이 실각하던(1873) 41세부터 61세까지 중년 시기는 강경한 상소를 올려 두 차례 절도(絶島)로 유배를 가야했던 항소기(沆疏期)요.
(4) 갑오경장(1894)이 일어나던 62세부터 7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년 시기는 개화 정책에 반대하고 일본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켰다가 결국 대마도에 불잡혀가서 죽음을 맞았던 항의기(抗義期)라고 할 수 있다. (주석 4)
또 다른 연구가의 면암에 관한 분석이다.
한말의 국가원로로서, 또 유림의 태두로서 추앙된 면암 최익현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충신이었고, 또 애족애국의 정신에 투철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천한 사상가요 학자였다. 그의 위정척사사상은 바로 그의 애족애국의 민족사상이었고, 외압에 의한 국치민욕을 광구하려 한 일대 민족운동의 실천지도이념이었다.
그러므로 면암의 위정척사사상은 일제치하에서는 위험사상으로 지목되고, <면암집>의 목판까지도 몰수 소각당할 정도로 억압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루한 유학자의 사상이라고 왜곡 선전되었다.
그러나 이 같이 일제시대에 면암 사상 및 실천 운동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광복 후에도 여전하게 답습되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면암에 대한 연구가 전무했다는 것은 일제 때의 잔재의식에서 결과된 것인지 분명치 아니하나, 설사 그렇지 않다손 치더라도 면암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없었다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석 5)
주석
1> 강제언 저, 정창열 역, <한국의 개화사상>, 258쪽, 비봉출판사, 1981.
2> 홍순창, <한말의 민족사상>, 54쪽, 탐구당, 1982.
3> 금장태, <화서학파의 철학과 시대의식>, 209쪽, 태학사, 2001.
4> 앞의 책, 209~210쪽.
5> 홍순창, <한말의 민족사상>, 83~84쪽, 탐구당, 1982.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