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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게 뭐 있나, 샴푸 덜어갈 공병이나 사고 각자 필요한 거 담을 대형 파우치 정도 사면 될 거 같아'라고 생각한 건 내 오판이었다. 4일 앞으로 다가온 여행 준비를 내일까지는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준비물 목록을 적었다. 나의 하루를 시뮬레이션하며 필요한 것을 적어나갔다. 손바닥만 한 메모지가 꽉 채워졌다.

살 것과 집에서 가져갈 것, 살지 말지 고민되는 품목으로 나눴다. 일단, 대형 파우치는 가족들 각자 따로 하나씩 사기로 했다. 파우치 종류가 여러 개라 상품평이 많은 것부터 살펴봤다. 마음에 드는 두 종류가 있었다. 겉보기는 거의 비슷한데 자세히 보니 색상과 크기가 미세하게 차이가 났다. 하나를 고르고 색상을 아이보리, 실버, 브라운으로 정했다. 파우치 하나 고르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작년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일회용 부직포 베개커버를 가져갔었다. 남이 쓰던 베개를 쓰기 싫어서 가져갔었는데 감촉이 별로였다. 오늘 보니 업그레이드된 밴딩 베개커버가 나왔다. 머리가 닿는 베게 윗부분만 밴딩을 걸어 씌워주는 건데 면이라 베게 감촉과 똑같다고 했다. '베개 대신 가져가세요'라는 문구가 쏙 와닿았다.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은 비슷한데, 누군가 지나치지 않고 상품화해 주니 너무 고마웠다.

어머, 일회용 속옷이 진화했다. 부직포 같은 재질이 아니라 면이다. 상품평도 좋다. 여행용, 병원 입원용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살 생각이 없었는데 여름이고 빨래를 한다고 해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담았다.

다음은 공병이다. 다이소에 갔을 때는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아서 고민스러웠는데, 쿠팡은 종류가 너무 많아서 고민했다. 국산인지, 용량은 적당한지, 액체가 새지는 않는지, 라벨링은 되는지, 상품평은 좋은지 하나하나 따져 장바구니에 담았다.

치실까지 들어있는 칫솔 치약 여행용 세트, 돼지 코 어댑터, 티슈형 세제와 섬유 유연제, 영양제를 소분할 지퍼백, 미니 보석함, 롤 빗, 접이식 스팀다리미, 접이식 드라이기, 초경량 양산 겸 우산, 선크림, 물티슈, 컵라면, 실온 보관 가능한 볶음 김치, 햇반 등 계획에 없던 물건까지 다 담았다. 분명 살 게 많지 않았는데 많아졌다(살 게 많았으면 이삿짐 될 뻔). 이 모든 게 다음 날이면 배송된다(고 좋아하는 나).

쿠팡 노동자들 사고에 분노하면서 하루 배송에는 흡족해하는 나 자신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평소 자주 이용하지 않는 쿠팡을 마음 한편에는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일이면 배송되는데 미리 준비할 필요 있나 천천히 하면 되지 뭐' 하면서.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 새벽 5시 넘은 시간에 쿠팡CLS 측으로부터 다른 동료 택배기사의 물량을 대신 배송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고 정슬기 택배노동자가 카톡에 응답한 내용
"개처럼 뛰고 있긴 해요"새벽 5시 넘은 시간에 쿠팡CLS 측으로부터 다른 동료 택배기사의 물량을 대신 배송해 달라는 요구를 받고, 고 정슬기 택배노동자가 카톡에 응답한 내용 ⓒ 택배과로사대책위
 
그러다가 전날 본 기사가 생각났다. 쿠팡 배송 기사로 일하신 분이 자택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는데 그분이 살아계실 때 쿠팡 측과 나눈 카톡 대화였다. '달려 달라'는 쿠팡 측 문자에 '개처럼 뛰고 있긴해요'라는 답변이었다. 개처럼 뛰고 있다니...

유족이 된 아내는, "저는 바라는 거는 그냥 단 한 가지에요. 애 아빠한테 가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내가 만든 시스템으로 이렇게 됐다..."라고 말했다. 쿠팡 택배 대리점 중 90곳이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보도도 함께 나왔다.

나는 이렇게 편하게 이용하는데 배송 기사분들이 과로에 돌아가시는 걸 보면 이걸 이용하는 게 맞는지 생각하게 된다. 왠지 나도 비극에 동참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이 편리함이 누군가의 고통 위에 쌓여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소비자로서 이대로 바라보기만 해도 되는 걸까. 조금의 힘이라도 보탤 수 있지 않을까.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단체나 캠페인을 지지하는 일, 관련 서명 운동에 동참하는 일처럼 사회적인 연대를 통해 변화를 촉구하는 방법이 있다. 미미해 보이지만 더 많은 사람이 문제 인식을 함께 한다면 기업의 태도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은 소비자의 목소리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하루 배송의 편리함을 잘 알고 있다. 세상이 빠르고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쿠팡을 자주 이용하지 않았던 건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과로사 사건 기사 때문이다. 남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환경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

쿠팡이 근무 환경을 개선해서 노동자는 안전하게 일하고 소비자는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기업이 되길 바란다. 일하다 죽는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목소리가 기업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사회를 더 공정하고 인간적으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입니다.


#쿠팡배송#편리한쇼핑#불편한진실#노동환경#사회적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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