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진흥과 세계화를 위해 평생을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넘나들었던 박수남 대사범이 지병으로 지난 6월 14일 독일에서 운명을 달리했다. 향년 77세.
1947년 이동면 무림마을에서 태어난 박수남 사범은 세 살 되던 해, 아버지 직장을 따라 하동으로 이사를 갔다가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부산으로 터를 옮겼다. 박 사범은 성인이 되어서는 장대한 기골을 자랑했으나 성장기에는 체격이 왜소해, 누나의 권유로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태권도를 배웠다. 태권도에 재능을 보인 박 사범은 1969년 최우수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다.
경남고와 건국대 축산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1971년부터 5년간 서울 남산에 있는 외인아파트 근처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태권도 사범을 했다. 이때부터 외국 진출을 꿈꿨다. 1975년 12월 더 큰 꿈을 꾸고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독일로 떠났다. 당시 독일협회장이던 하인츠 막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60년 태권도 인생, 그가 유럽 태권도계에 미친 영향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이듬해인 1976년 5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제1회 유럽선수권대회`에서 독일대표팀은 전체 8개 체급에서 5개 체급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이후 박 사범이 대표팀을 맡은 10년간 독일 팀은 격년으로 열리는 유럽선수권에서 5연속 종합우승의 위엄을 달성한다. 이에 독일연방공화국 공훈훈장을 받았다.
1985년 독일대표팀에서 물러난 후 박 사범은 1986년부터 1987년까지 2년간 오스트리아 대표팀을 맡는다. 그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박 사범은 오스트리아 태권도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공로로 결국 2006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박수남 기념우표`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1988년에 다시 독일대표팀으로 복귀한 박 사범은 독일대표팀을 이끌고 서울올림픽에 참가했다. 1989년까지 독일팀을 맡은 후 박 사범은 영국태권도의 발전에도 일조했다. 그런 인연으로 1990년에는 영국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취임한다.
박 사범이 유럽 태권도계에 미친 영향은 독일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유럽태권도연맹 부회장을 맡았고, 2001년에는 WTF(세계태권도연맹) 집행위원에 선출된 후, 2005년에는 선출직 부총재에 당선되며 전 세계 태권도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게 된다. 2011년 박수남 사범은 세계어린이태권도연맹(CTU)를 만들어 총재직을 수행해 왔다. 아울러 유럽태권도연맹 종신 명예회장을 맡았으며, 모교인 건국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영산대에서 태권도학과 석좌교수 직책을 받았다.
그는 눈을 감기 전까지 60년 태권도 인생을 살며 보고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후대에 남길 유산으로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 태권도를 할 수 태권도와 전통의학이 융합된 `경략품세` 집필에 힘썼다.
고인은 "길이 태권도계 태권도 후학들, 한국 한의학계가 지속 발전시켜 주길 기대한다. 미완의 과업을 그대들에게 바친다"고 유지를 남겼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남해시대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