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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며 의병봉기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이다. 모덕사에 세워진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
 최익현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며 의병봉기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이다. 모덕사에 세워진 면암 최익현 선생 동상
ⓒ 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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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은 위정척사를 삶의 기본가치로 삼는 유학자이다. 정(正)을 지키고 사(邪)를 배척하면서 살아왔다. 1차 목표이던 대원군을 퇴진시키고 국정을 바로잡고자 해서 일단 성공은 했지만 자신은 권력이동의 수레바퀴에 치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외세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왔다. 참을 수 없었다. 비록 관직은 없지만 선비라는 위상에서 나라의 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할순 없는 일이다. 강화도조약 체결을 앞두고 조정은 물론 나라가 크게 소연하였다.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 그러나 조정은 일본의 군사력에 위압당하고 있었다.

면암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1876년 1월 19일 서울로 와서 관소를 정한 뒤 5개항의 개화 반대 이유를 적시한 5불가(五不可) 척화상소문을 지었다. 그리고 날센 도끼를 둘러메고 광화문에 엎드렸다.

도끼를 메고 하는 상소라 하여 <지부상소(持斧上疏)>라 불린다. 

임진왜란 직전(1591년 선조 24)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사신 현소를 조선에 보내어 명나라를 공격할 터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여 오자 조정에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중봉(重峰) 조헌(趙憲)이 지부상소를 하여 왜국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주청하였다. 

중봉은 상소문에서 명나라를 비롯하여 유구 등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왜군을 막고 대마도·일본의 의민들에게 풍신수길을 토벌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왜국 사신 현소 등의 죄목을 열거하여 참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때 승정원에서 중봉의 상소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받지 않았고, 사간 홍여순이, 언로를 막는 폐단이 있을 지 모르니 당장 승지를 파직시킬 것을 요청했으니 선조가 그 승지를 추인에 그치게 하였다. (주석 1)
 모덕사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 생가는 지난 5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모덕사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 생가는 지난 5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 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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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우고 청주성을 수복했으며 금산전투에서 700의사와 함께 장렬히 순사하였다. 면암은 이같은 중봉의 고사를 되새기면서 도끼를 메고 광화문 앞에서 <지부상소>를 한 것이다. 

지부상소문

신은 듣사오니 화친이 저 나라가 애걸하는 데서 나온 즉 강한 것이 내게 있어서 내가 족히 저 나라를 제어할 것이요 그 화친을 가히 믿으려니와, 화친이 내가 약한 것을 보이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권세가 저 나라에 있어 도리어 우리를 제어할지니 그 화친을 믿지 못할지라. 금일 화친이 저 나라가 애걸하는 것이옵니까, 우리가 약한 것을 보이는 데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가 방비 없이 겁이 나서 화친을 구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아나니 저 나라가 방비 없이 약함을 알고 우리와 화친한 즉 한량없이 구하는 욕심을 어찌 채우리요.

내 물건은 한이 있고 저 나라의 구함은 많지 아니 하리니 한번이라도 아니 주면 노함에 전공(前功)이 없으리니, 이것이 화친하면 망할 일 한 가지요.

하루라도 화친한즉 저놈의 소욕(所欲)이 물화(物貨) 상환(相換)하기에 있음에 저 나라 물건은 다 손으로 아로새기어 한이 없는 것이요, 우리나라 물건은 다 백성의 먹고 입는 것이니 땅에서 나서 한이 있는 것이라, 한 있는 진액으로서 한없는 어린아이나 속일 무용지물을 상환함에 해마다 억만금으로 회계한즉 몇 해가 못하여 전국 수천 리에 황주패옥이 되어 다시 지탱치 못하고 나라도 망할지라, 이것이 화친하면 망하는 일 두 가지요. 

저놈이 명색은 왜인이나 실상은 양인(洋人)이라 화친을 한번 하면 천주학책과 천주의 화상이 혼잡히 매매되어 선생·제자로 전수하여 일국에 편만 할지니 포청으로 잡자 한즉 저놈이 분노하여 화친 맹세가 허사될 것이요 임타(任他)하여 두자 한즉 집집마다 사람마다 천주학에 환장되어 부자군신·오륜삼강이 영절하여 금수가 될지니, 이것이 화친하면 망하는 일 세 가지요. 

화친한 후에 저놈이 하륙하여 왕래하고 혹 경내에 집을 짓고 살고자 한즉 내가 벌써 화친을 허락하였음에 막을 말이 없고 막지 못하여 임타한즉 재물과 부녀의 겁탈을 제 마음대로 할 것이니 누가 막으리오. 또 저놈은 면모는 사람이나 심장은 짐승이라 조금이라도 합의치 아니 하면 사람 죽이기를 기탄없이 할 것이니 효자와 열녀가 부모나 가장을 위하여 복수하려 한들 웃사람이 화친에 허사됨을 염려하여 감히 송사를 결단치 못할지니 이런 일을 종일 못하여도 못다 할 것이므로 인륜이 없어지고 백성이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화친하면 망하는 일 네 가지요.

화친을 창론하는 자는 거개 병자년 남한산성 일을 인증하여 왈 "병자년에 청국으로 더불어 화친한 후에 피차 화합하여 천리봉강(千里封疆)이 지금껏 반석같이 편안하니 금일에 저 나라와 화친하면 그 어찌 홀로 그렇지 아니 하리요." 하나니, 신은 이르되 이는 어린아이의 소견과 같으니 병자년 화친도 대단히 의리에 손상한지라. 이런 고로 문정공 신(臣) 김상헌과 충정공 신 홍익한 같은 이가 죽기로 간하였거니와, 그러나 청인은 중국에 천자 노릇하여 사해를 진무하기에 뜻이 있는 고로 오히려 중국 패왕의 일을 본받아 소국이 대국을 섬긴즉 피차 화합하여 관대한 도량이 있고 침략하는 걱정이 없었거니와 저놈은 단지 재물과 여색만 알고 한 푼도 도리는 없은즉 금수와 같은지라. 사람이 금수로 더불어 화호(和好)하여 떼지어 같이 있으면서 해를 아니 보고 근심 없는 이치는 없사오니, 이것이 화친하면 망하는 일 다섯 가지입니다. 

잠깐 대강 말씀함에 이러하오니 동서를 분간하는 자는 가히 그 오계(五戒)인 줄을 알 것인 즉 하물며 화친한 후에 가령 걱정이 없을지라도 신의 소견에는 대단히 틀린 일이 있사오니 우리나라는 기자 같은 성인이 가르치시고 대명(大明) 천자의 법을 쫓아 태조대왕 이래로 예의를 환연히 밝혀서 내려오는 나라를 어찌 일조에 서양국 금수에게 비하게 하오리까.

자래로 국권을 주장(主將)하여 이 의론을 하는 자는 진회(秦檜)·손근(孫近) 같은 무리들이 다 편하게 제 몸만 보존하고 제 처자만 보존할 계책으로 이런 무상한 일을 하다가 임금에게 악명을 끼치는 것이로소이다.

슬프다. 신하 되어 임금을 섬김에 마땅히 옳고 착한 일로 요순 지위가 되시게 할 것이거늘 도리어 망할 계책으로 임금을 만 길 구덩이에 빠지시게 하니 천하의 지극한 불충지신이 아니면 어찌 차마 하오리까. (주석 2)


주석
1> 이석린, <임란의 명장 조헌연구>, 182쪽, 신구문화사, 1992.
2> <면암선생 사실기>, 작자·연대 미상·필사본, 독립기념관 소장.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익현평전#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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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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