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명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가 마치 문화계 블랙리스트처럼 한국 영화를 좌파, 우파로 분류했던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관련기사:
정우성, 문소리도 좌파? 이진숙 '이태원참사 배후설' 이어 또 구설 https://omn.kr/29e6v).
10일 <MBC 뉴스데스크>는 2022년 12월 이진숙 후보가 자유민주당에서 했던 강연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당시 강연에서 이 후보는 "문화 권력도 좌파 쪽으로 돼 있죠? 이거 보면은 기가 막힙니다"라며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택시운전사>와 친일파 암살 작전을 다룬 <암살>과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기생충> 등 영화를 좌파 영화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이 후보는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태극기 휘날리며>와 <인천 상륙작전>, 소시민의 현대사를 다룬 <국제시장> 등은 우파 영화로 분류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우파 영화라고요?
<태극기 휘날리며>는 영화 제목만 보면 이진숙 후보의 주장처럼 우파 영화 같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한국전쟁의 참상을 그린 반전 영화에 가깝습니다.
특히 전쟁 영화로 국방부와 해군의 지원을 받은 <연평해전>과 달리 <태극기 휘날리며>는 전혀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강제규 감독의 언론 인터뷰 등을 보면 시나리오를 들고 국방부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지만 국방부는 일부 내용을 수정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국방부가 수정을 요청한 장면은 '보도연맹 학살'입니다.
영화에서 이진태(장동건)의 약혼녀 김영신(이은주)은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 만으로 반공청년단에 끌려갑니다. 김영신은 '보리쌀 배급을 받기 위해 가입했을 뿐 빨갱이는 아니다'라고 항변했지만, 반공청년단은 이를 무시합니다. 오히려 총살을 막으려는 이진태를 향해 '도와주면 너도 빨갱이'라며 총을 겨누고 영신은 끝내 총을 맞고 죽습니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좌익 성향의 사람들을 전향시키겠다고 만든 단체입니다. 공무원들은 가입 실적을 높이기 위해 쌀배급 등을 미끼로 평범한 양민들도 무작위로 가입시켰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적 행위를 막겠다며 이들을 학살했는데, 민간인 희생자만 6만 명에서 20만여 명이었습니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전쟁 중에 벌어진 우발적인 학살과 달리 이승만 정권의 치밀한 계획하에 공무원, 경찰, 군인, 반공청년단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전쟁 범죄였습니다.
영화에서 동생 진석(원빈)은 거리에서 강제 징집을 당합니다. 이를 본 형 진태(장동건)가 항의하다 형제가 모두 군대로 끌려갑니다.
이 장면을 두고 보수 단체에서 트집을 잡았고, 국방부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자진 입대하는 걸로 시나리오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은 국방부 요구대로 시나리오를 수정하면 국군 홍보 영화가 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하고 국방부 지원 없이 영화 제작을 강행합니다.
후일담으로 <태극기 휘날리며>는 국방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50억 원의 제작비가 추가로 들었지만 흥행에 성공합니다. 이후 국방부가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는 등 오히려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카데미 수상작 <기생충>도 좌파 영화?
이진숙 후보자는 영화 <기생충>도 좌파 영화로 분류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 2월 11일 우리나라 신문들은 일제히 1면에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작품상·감독상·각본상·국제영화상) 수상을 보도했습니다.
당시 보수 성향의 <조선일보>는 "'화이트 오스카 92년'을 뒤집다"라는 제목으로 1면을 할애했고, 사설에선 "우리보다 먼저 아카데미를 두드려온 일본과 중국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라며 '한국 문화의 역사적 성취'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후보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일보>는 좌파 영화를 극찬한 셈입니다.
이 후보는 2020년 강연에서 "대한민국은 현재 좌파적 문화가 지배적 문화다. 이런 현상을 균형적으로 만들어 보고자 정치에 들어왔다"라고 했습니다.
영화를 좌파, 우파로 나누는 단순함을 보면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보리쌀 배급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영신의 말을 무시하고 "넌 빨갱이"라며 학살한 반공청년단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요.
방송통신위원장은 방송 정책이나 규제를 총괄하는 수장입니다. 위원장이 누구냐에 따라 대한민국 방송의 앞길이 정해집니다. 그런 막중한 권한을 행사할 후보의 지난 행적과 발언을 보면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태가 재연될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덧붙이는 글 | 독립언론 '아이엠피터뉴스'에도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