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할수록 치가 떨립니다."
지난 12일 재판에 다녀온 뒤로 박미숙씨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일하다 숨진 고 장덕준씨의 어머니인 박씨는 쿠팡(쿠팡풀필먼트서비스) 측이 '아들의 걸음'과 '골프의 걸음'을 비교한 것을 떠올리며 이렇게 전했다.
쿠팡 쪽 대리인은 지난 12일 열린 손해배상소송 6차 재판에서 '(장씨가) 본인 페이스대로 여유롭게 일했다"며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박씨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은 말이었다.
"저희가 측정해본 결과 (장씨가 맡았던 업무인) '워터스파이더'는 하루 평균 2만 보 정도 걷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4시간 정도 골프를 치며 걸으면 1만 5000보 정도 걷게 됩니다. (장씨가 일한) 8시간 동안 2만 보라고 한다면 견디기 힘들 정도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박씨는 15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물류센터에서 기를 쓰고 일하는 노동을 골프치며 걷는 것에 비유한다는 점에서 치가 떨린다"며 "노동자들의 노동이 그들에게는 한낱 놀이에 비유된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진다"고 지적했다.
1년 2개월 동안 새벽 노동을 이어갔던 장씨는 2020년 10월 12일 퇴근 후 욕조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2020년 2월 근로복지공단은 장씨가 극심한 육체 노동에 시달렸다는 점을 인정, 산업재해로 판정했다. 이후 박씨는 쿠팡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쿠팡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서로 다른 '걸음수' 주장
특히 쿠팡이 추정한 장씨의 걸음수는 박씨가 계산한 것과 차이가 컸다. 쿠팡과 박씨는 모두 CCTV에 잡히지 않는 동선까지 고려해 장씨의 걸음 수를 추정했다. 박씨는 200시간 분량 CCTV 영상을 7개월 가량 들여다봤다.
박씨의 계산에 따르면 마지막 날 근무였던 2020년 10월 11일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장씨의 걸음 수는 4만 1718보였다. CCTV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걸음 수만 1만 8749보였다.
해당 공판에선 장씨 사망 전 6일치 CCTV가 증거로 채택됐다. 쿠팡이 2020년 12월 장씨 산업재해 심사 당시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했던 영상이다. 영상에선 장씨가 뛰거나 물품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장면이 담겼다. 또 마지막 근무 날 가슴을 움켜쥐고 18초 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모습도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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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omn.kr/29epf).
하지만 쿠팡 쪽 대리인은 "망인은 필요한 부자재를 보충하는 업무로 본인이 업무 템포를 조절할 수 있고, 중간 중간 작업장 바깥에 있는 음료수 자판기를 이용할 수도 있었다"며 "(가슴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면은) 폐비닐을 버린 후 이것을 확인하는 모습으로 전조 증상을 보였다고 하긴 어렵다"라고 주장했다.
쿠팡 유족들의 만남, 그만둘 수 없는 이유
이날 공판에는 특별한 인물이 자리했다. 지난 5월 숨진 쿠팡 택배시가 고 정슬기씨의 아버지 정금석씨였다. 법정 밖에서 만난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박씨는 "안 봐도 되는 인연인데 이렇게..."라고 운을 떼자, 정씨는 목례 이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씨는 남겨진 4명의 손주(슬기씨의 자녀)를 언급했다. 정씨가 "손녀가 초등학교 5학년이고, 큰 애가 중학교 1학년인데 힘들어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게 가장 힘들다. 덕준이 동생이 둘이다. 사고 났을 때 막내딸이 중학교 1학년이었다"라며 "얘들을 생각하면 그만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여기서 포기하기엔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법정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한 뒤 헤어졌다. 양손을 맞잡으며 "도울 게 있으면 돕겠다"는 말을 주고받았다. 경북 경산으로 가기 위해 SRT를 타러 가던 길, 박씨는 정씨를 만난 뒤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솔직히 '(쿠팡과 싸움) 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합의할 수 있으면 빨리 합의해버리라고. 한편으론 (정씨를 보며) 함께 싸울 동지가 생겼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이 싸움을 끝낼 수 있다'는, '또 다른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보이는 느낌이거든요. 양가적인 감정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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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팡 과로사 장덕준의 마지막 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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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현광, 소중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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