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회사로부터 위임을 받았다거나 자신에게 권한이 있다고 기망해서 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 피고인이 불특정 다수 피해자를 상대로 상당한 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행해졌고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징역 5년을 선고한다."
대구 북구 침산동 다세대주택을 지은 뒤 신탁회사에 넘겨주고도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17가구와 임대차계약을 체결해 전세보증금 15억5000만 원을 편취한 임대인 A씨에 대해 23일 대구지법 형사1단독(부장판사 박성인)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판사가 징역 5년을 선고하자 재판을 지켜보고 있던 임차인들 입에서는 "아..."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한 세입자는 "우리가 피같이 모은 돈으로 전세사기를 당했는데 고작 징역 5년이냐"며 "착잡하고 욕밖에 안 나온다. 임대인은 징역을 살고 나오면 그만이지만 우리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라고 분노했다.
또 다른 세입자는 "전재산을 한꺼번에 잃었는데 고작 징역 5년으로 끝난다니 말이 안 나온다"며 "임대인이 항소해서 더 적은 형량을 받기라도 한다면 의기양양해서 또 사기 칠 것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A씨는 2018년 12월부터 2022년 9월까지 대구 북구 침산동에 다세대주택을 지은 뒤 채무 담보를 위해 소유권을 신탁회사에 넘겨주고도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임대차계약을 체결하고 임대보증금을 편취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신탁 관련 법리에 익숙하지 않은 청년들이나 신혼부부들에게 주택이 자신의 소유라거나 신탁이 돼 있어 더 안전하다고 속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9일 열린 1심 결심 공판에서 검찰은 피고인 A씨가 범행을 반성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해 징역 7년을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피해자에 가장 효과적인 심리치료는 가해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재판이 끝난 뒤 전세사기·깡통전세피해대구대책위원회와 전세사기대구피해자모임은 대구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심리치료는 가해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라며 전세사기 임대인에 대한 신속한 수사와 강력한 처벌을 촉구했다.
이들은 "피해자 대부분은 20대에서 40대까지 청년층이거나 신혼부부들"이라며 "사회초년생 39명을 대상으로 15억 원이 넘는 전세보증금을 전세사기로 가로챘음에도 임대인은 반성은커녕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여당과 국회는 전세사기 문제해결을 위한 특별법 개정을 다시 한 번 요구한다"며 "수사기관과 사법부에는 피해자들의 일상 회복을 위한 신속한 수사와 강력한 처벌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정태운 전세사기대구피해자모임 대표는 "지난 1년 동안 살고 있는 집에서 당장 나가고 싶었지만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나갈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며 "저도 다음 생에서는 꼭 임차인이 아닌 임대인으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서민을 지옥으로 내몬 대가가 고작 징역 5년이라니 좀 불합리한 것 같다"며 "이번 재판이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다른 전세사기 재판에서는 피해자들의 마음을 담아 가해자들을 엄벌하는 형이 내려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석진미 경산전세사기대책위 공동위원장은 "수많은 가정이 삶의 터전을 잃고 경제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며 "피해자들이 증거를 찾아서 제출하고 힘든 과정을 거쳐서 기소가 되더라도 합당한 처벌이 나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