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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읍의 장좌마을은 1000여 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이다.

서기 828년(흥덕왕 3년) 흥덕왕은 청해진을 설치하고 장보고대사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서남해안의 방어는 물론 남해안과 동중국해안에 출몰하는 해적을 소탕하게 하였다. 

장좌마을은 청해진 최고의 핵심시설이라 할 수 있는 장도(將島)가 있는 마을로 장도로 들어가기 전 이곳 사람들이 매단(埋端)이라 부르는 둔덕이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곳이 군영(軍營)을 보호하기 위해 흙을 인위적으로 쌓아 만든 군사시설이라고 하여 지난 1990년대 청해진유적 발굴단에서 트렌치(trench. 지표조사)를 넣었으나 전반적인 조사결과 통일신라시대 문화층(文化層)은 발견되지 않아 자연적으로 생성된 둔덕으로 판명됐다.

이 매단에 장좌마을의 방풍림이 조성되어 있다. 면적은 약 5000㎡(1500평)에 130~150년 생 소나무 37본, 크기가 남다른 구실잣밤나무 6본, 참나무 5본, 팽나무 2본, 붉가시나무 1본이 대표적으로 자라고 있다. 이외에도 벚나무 6본, 비자나무 1본, 후박나무 2본과 함께 최근에는 마을에서 공원으로 정비하면서 군에서 동백나무 150본을 식재하고 팔각정을 세군데 세웠다. 

외부에서 언 듯 보면 방풍림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숲이 허술하나 주민들에 의하면 매단의 숲이 있으므로 해서 여름철 샛바람(동남풍)이 아무리 몰아쳐도 마을은 조용하다고 한다. 원래 이곳은 60년전만 하더라도 숲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커다란 팽나무 다섯 그루가 고사하고 해송도 태풍으로 많이 쓰러져 마을에서 베어냈다고 한다.       

보통 이러한 둔덕은 풍수적으로 비보기능(裨補機能)을 갖추는 경우가 많은데 매단은 비보기능보다는 동남쪽에서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을 막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매단 뒤쪽으로는 집이 들어서 있고 군데군데 밭(田)이 형성되어 밭농사를 짓고 있다. 장좌마을은 갱번을 전포와 후포로 나누는데 그 기준점이 바로 매단이다, 매단에서 뒤쪽을 후포(後浦. 뒷개) 앞쪽을 전포(前浦. 앞개)라 한다. 전포는 연중 굴(석화)양식이 이루어지고 후포는 개펄이 좋아 고막양식과 겨울철 감태가 특산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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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단에서 장도로 건너가는 중간에는 활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큰 바위를 중심으로 작은 바위 몇 개가 모여 있는데 청해진시대에 장군들이 매단에서 활바위를 과녁삼아 활을 쏘아 바위가 쪼개졌다고 전하고 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구전되어오는 이야기이다. 활바위는 후포와 전포를 지나는 배(船)의 통행기준점이 되기도 하는데 반드시 활바위가 물속에 잠겨야만 배가 안전하게 전포와 후포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활바위가 물에 잠기지 않을 경우 수심이 유지되지 않아 배의 스크류가 땅에 닿아 배가 파손되기 때문이다.       

원래 이 매단은 옛날에는 어린이들이 가기 꺼려하는 아주 무서운 곳이었다. 그 이유는 장좌마을의 상여집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화가 이루어지면서 1970년대 초 새마을운동과 함께 상여집이 철거되고 주변을 정비하여 마을 노인들과 주민들의 하계피서지가 됐다.

여름이 되면 마을의 노인들과 주민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장기를 두거나 담소를 나누는 마을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경로당에 시원한 에어컨이 설치되고 이제는 이 숲도 마을 주민들의 피서지로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다양한 나무가 혼재되어 있는 매단의 방풍림에서 주목할 만한 나무는 소나무와 구실잣밤나무이다. 소나무는 금강송(金剛松. 참솔)이 세 그루 자라고 나머지는 해송(海松. 곰솔)인데 해송의 특징은 나무가 자연스럽게 굽은 것인데 이곳의 해송은 특이하게 근원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외줄기로 솟아올랐다. 해송의 수고는 15~18m 이고 흉고둘레는 150 ~ 200cm로 거의 동시대에 인공적으로 심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실잣밤나무도 크기가 상당하다, 전체 여섯 그루 중 네 그루가 거목(巨木)으로 자라고 있는데 흉고직경이 240 ~ 340cm이다. 수고는 12~15m로 잣밤나무로서는 아주 보기 드문 굉장히 큰 나무이다. 아직까지 수세는 안정적이고 좋은 편이나 안타까운 것은 보호수로 지정이 되지 않아 일부 가지가 썩어 들어가고 있으나 외과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다.  

매단은 해안과 맞물린 남쪽 사면의 토사 유출이 심했는데 최근에 견치석(堅緻石)을 이용하여 석축(石築)을 쌓고 남쪽 사면을 완전히 정리하여 더 이상의 토사 유출은 막았다. 원래 이 매단 주변은 집이 없었으나 어느 때부터 집이 들어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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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좌마을 토박이 김동규(87. 완도읍 장좌리, 사진)옹의 이야기다. 

″참솔(황장목)은 쭉 곧았잔애 그랑께 집짓는데 참 좋아, 곰솔(해송)은 오래되먼 껍질이 막 거북이 등거리처럼 움푹 패인디 그런 나무는 징하게 깡깡해 그랑께 배를 짓는 데 참 좋은 나문디 여그 나무는 마을 나무라 아무리 좋아도 누가 손대들 못해 그랑께 이라고 버티고 서 있제."

"글 안하먼 저렇게 존 솔나무를 폴쎄 누가 비어가붓제 이라고 남었것어. 내가 우리 할아부지 한테 들은 이야긴디 이 솔나무는 할아부지 형제간들이 심었다고 하듬마. 할아부지 작은 동생이 젊었을 때 마을 이장을 했데, 글기 전에도 매단에는 나무가 많앴는디 태풍으로 쓸어져분께 솔나무를 다시 심었다고 하듬마.″

″우리 장좌리는 겁나게 큰 마을이여, 1970년대만 하드라도 주민들이 거의 1200명 정도 살었는디. 그란디 지금은 다 떠나고 부부간에 살거나 혼자 사는 노인들도 여러집이여. 옛날부터 여름에는 전포에 있는 사장나무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매단에도 많이 모였어. 특히 여름철 저녁이먼 마을 사랍들이 꺼적(밀대로 만들었다 함)을 하나썩 들고 다 일로 모테요." 

″지금은 집집마다 에어콘이 있는디 옛날에는 에어콘이 없잔애 그랑께 여름이먼 저녁밥을 묵고 전부다 여그로 모테 그라먼 바람이 불어와서 시원해 그란디 바람이 불어도 모구(모기)가 징해 집에 있어도 모구가 많은께 모다 여그로 오제, 모굿불을 서너군데 피어 그라먼 연기가 징하거등 그라먼 모구가 거짓깔(거짓말) 같이 사라져 그랑께 밤새 모굿불을 피야되아, 사람들이 전부다 꺼적을 갖고 와서 깔고 자제. 그란디 전포 선창은 모굿불을 안피도 이상하게 모구가 없어 그랑께 거그서도 많이 잤는디 살(사리)때 먼 물이 선창을 넘어부러 그라먼 사장으로 와서 자다 물이 빠지먼 또 선창으로 가고 참말로 옛날 애기구만.″

″저 곰솔은 당제를 지낼 때 요긴하게 쓰기도 했는디 우리마을은 정월 보름때먼 꼭 당제를 모신디 제가 끝나도 20일 정도 집집마다 돌아댕김서 마당밝기를 하거 등. 그때 여그 곰솔나무 가지 이삔 놈을 비어서 부포를 만들어쓰고 농악을 치로 댕겠어. 내가 젊었을 때는 여그가 서나무(서어나무) 큰 놈도 겁나게 많앴는디 다 죽어불고, 지금 쩌그 팽나무 한나 보이제, 쩌그가 동네땅인디 옛날에 팽나무가 언마나 큰고 하먼 진짜 우리가 다섯이가 보듬마사 삥 둘룬당께 그란디 다 죽어불고 지금 다시 새로 한나가 나갔고 잘 크고 있당께.″


장보고대사의 혼이 매단의 방풍림을 잘 지켜주기를 바라며 마을을 떠났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유영인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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