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운전할 때 듣는 건 8090 인기가요, 그러니까 1980~90년대 유행했던 가요들이다. '기본값'은 이오공감과 유재하, 김광석이고 '선택값'은 김동률 1,2집이다. 기본값은 가사가 마음을 울리고 선택값은 목소리가 마음을 울려서 그렇다. 그러던 어느 날, 차 옆에 탄 아이가 새로운 노래 좀 들으라며 모르는 노래를 튼다.
음색이 너무 좋다. 이영지의 '스몰걸(Small girl, feat. 도경수)'이었다. 집에 와서 뮤직비디오를 찾아봤다. 뮤비는 더 좋다.
로맨스 장르에서 변하지 않는 공식이 있다. 남주인공은 여주인공보다 키가 적어도 20센치 정도는 커야한다. 그러면서 적당한 근육, 어지간한 수트가 팽팽해질 만큼 떡 벌어진 어깨를 가져야 한다. 반면 여자 주인공은 바람 불면 날아갈 만큼 가녀린 몸을 가져야 한다.
스몰걸 뮤직비디오 속 이영지와 도경수는 이 공식에 맞는 게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둘은 극중에서 완벽하다. 헌법같은 공식을 비틀어 놓고도, 그대로 너무 사랑스러워서 계속 볼 수밖에 없다.
뮤직비디오에 심취해 있는데, 아이가 또 화면을 바꾼다. 중학생 아이는 요새 콧볼 축소 수술에 관심이 많다. 수술 대신 보톡스 시술을 찾았다면서, 내게 이건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사실...
"얘야, 스몰걸은 본인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이 자기 비하나 셀프 과소평가를 하지 말기를 바라는거잖아. 이 노래를 그렇게 좋아한다면서 여전히 콧볼에 목매고 있으면 노래를 듣다만 거지."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했다면 아이는 '꼰대력 만렙'이라며 도망갈 거 같아서 마음으로 꾹 삼켰다. 요즘 나는 사춘기인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수시로 삼키느라 아주 배부를 지경이다.
나는 대신 '보톡스는 보통 넉달이면 빠져서 계속 맞아야 하는데, 너 주사바늘 무서워하잖아?' 라고 말했다. 아이는 삐죽거리더니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노래를 스피커로 연결해서 크게 틀어놓고 설거지를 했다. 보톡스 이야기를 한 직후라 그럴까. 가사에 나오는 small girl fantasy(작은 소녀 환상)가 Wrinkle-free fantasy(주름 없는 환상)로 들리는 것 같다. 이건 무슨 조화인가.
20대 후반까지만 해도 나는 여드름을 비롯한 잡티가 한번도 생긴 적이 없었다. 애당초 피부가 하얗고 깨끗하기도 했다. 피부는 타고난다 했으니 난 나이 들어도 계속 그럴 줄 알았다. 그러다 서른 후반의 어느날, 파트타임으로 일하던 유치원에서 다섯 살 아이가 했던 말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떤땡님(선생님), 떤땡님이 웃으면 우리 할머니만큼 선이 얼굴에 이르케 생겨요. 안 웃으면 선 없떠요."
주름이 많다는 말이었다! 아이가 웃으며 던졌던 이 말은 작은 바늘마냥 내 마음에 콕 박혔다.
그날 이후, 나는 보톡스를 매일 검색하며 시술 후기를 강박적으로 다 읽었다. 내 첫 보톡스 시술도 시작됐다. 고백하자면, 주사의 고통보다 이 주사로 다시 웃을 기대가 더 컸던 것 같다.
사춘기 아이가 본인 콧볼이 넓다고 엄마인 내게 투정 부릴 때마다, 나는 넓은 게 아니고 동그란 거라고, 선천적 스타일이고 그게 너의 귀여움이라고 했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히는 것 같았다. 이제와 생각하니, 씨알도 안 먹힌 이유가 혹시 내 보톡스 경력을 아이가 알기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아이가 보톡스를 찾은 건 내가 본을 잘못 보인 부작용일 수도 있다. 보톡스로 팽팽하면 뭐 하나, 내 탓인지도 모른 채 아이에게 신경질 내느라 심술 주름만 깊어진다. 지금 필요한 건 보톡스 얼굴이 아니라 아이를 너그러이 봐주는 따뜻한 미소다.
내가 날 사랑해주는 것
알다시피, 보톡스는 일시적이었다. 몇 달 지나니 주름이 다시 생겼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 '선'이 더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영지는 자긴 스몰걸의 조건을 가질 수가 없다고, 그건 나한테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노래한다. 마찬가지로 20대 후반까지의 매끄러운 얼굴은 이제 나한테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당연한 건데, 나는 지금까지 억지로 외면하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데에 씨알도 안 먹힌 건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아이한테 콧볼에 매달리지 말라고 하기 전에 나부터 얼굴 주름에 매달리지 않아야 했다.
'스몰걸이 될 수 없다'는 이영지에게 뮤비 속 도경수는 '날 향해 환히 웃어주기만 하면 돼'라고 말한다. 그 가사를 보고 들으며 나는 주름 있는 나를 미워하는 대신 스스로에게 이렇게 웃어주는 중년여자가 되어야지,라고 다짐해 본다. 내가 날 보고 웃어주면 그만이다.
주름 속에는 내가 웃고 울었던 날들이 모두 녹아 있다. 그러니 주름은 내 삶의 증거, 살아온 날들의 흔적이다.
젊음을 찬양하고 노화는 '관리 부족'으로 몰아가는 최근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 주름이 아름답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서 내 삶이 편안해진다면 그걸로 족하다.
노래 '스몰걸'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겠다고 버둥거리는 판타지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 같다. 어떤 판타지든지 간에 그게 나를 힘들게 한다면, 그런 판타지는 필요 없지 않을까.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유재하 가사와 김동률 목소리는 여전히 내게 울림을 준다. 그렇다 해도 그들이 보톡스 강박을 끊어주진 못했다. 옛날 기억만 즐기면서 포기해야 할 것을 미련스럽게 붙잡는 대신, 새로운 노래 안에서 나도 좀 편안해지는 쪽으로 진화해 보련다. 8090 인기가요를 끊을 때가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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