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과 이소선 어머니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에서 일하니까 좋아요."
라기주 이음나눔유니온 조합원(63)은 지난 6월 1일부터 전태일 기념관으로 출근한다. 보안경비직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채용 인원은 1명인데 서류 지원만 33명이 했다. 라기주는 2차 관문인 면접까지 거쳐 당당히 합격했다. 경비직이지만 일반적인 경비일과는 약간 다르다. 전태일 기념관을 방문한 관람객을 안내하고, 기념관의 행사 준비하는 일을 병행한다.
라기주는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잘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모범생으로 불렸다. 라기주가 문학을 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백일장에서 상을 받았는데 평소 연모하던 국어 선생님이 라기주를 교무실로 불렀다. "기주는 글을 참 잘 쓰는구나. 앞으로도 글을 계속 쓰면 훌륭한 작가가 될 거야"라며 비행기를 태웠다. 여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에 라기주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다.
"중학교 때, 흠모하던 여선생님의 그 말에 고무되어 문학을 하기로 결심했어요. 고등학교에 가서도 문예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그때 지도했던 선생님이 시인이신 전원범 선생님이셨어요. 늪에 빠지듯 시와 시조에 매료되었어요. 제가 전남학생시조협회 회장을 맡았어요. 서울에서 민족시 백일장이 있었어요. 저와 전원범 선생님이 참여했는데 선생님은 일반부 장원을 하셨고, 저는 학생부 장원을 했어요. 선생님과 제자가 나란히 전국 대회에서 장원을 했으니 학교에 경사가 났죠."당시에 받은 상금은 20만 원이었다. 그 당시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 수준이다. 상금을 그대로 어머니께 드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께 큰 상과 기쁨을 안겨드렸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라기주는 중앙대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에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가족들은 집안 형편을 생각해 경영학과나 경제학과에 가기를 바랐다. 라기주는 '가족을 버릴지언정 문학을 포기할 수 없다, 세상에 남을 글 하나 쓰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면서 가족들을 협박(설득)했다. 결국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한 그해,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졌다. 라기주는 중대신문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티브이와 신문을 통해 보고 들은 것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학보사 신문은 광주사태의 진실을 제대로 보도할 수가 없었다. 검열을 당연시하는 시대였다. 검열 받지 않은 신문을 만들어 뿌렸다. 보름 동안 피해 다녔다. 광주 집에서는 라기주에게 절대로 광주에 내려오지 못하도록 신신당부했다. 엄혹한 시절이었다.
시 쓰기를 잠시 접었던 이유
2남 5녀 중 막내였던 라기주는 부모님과 누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라기주의 말을 빌리면 "누님들의 치마폭에 싸여" 컸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던 라기주는 혹독한 대학시절을 보내던 중 입대를 한다. 제대 후 남은 학업을 마치고 1987년에 졸업을 했다. 당시에는 문예창작과를 졸업하면 중등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자격증을 받으려면 교생실습을 가야 했다. 광주동신중학교로 교생실습을 갔다 그때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국어 과목 실습을 했어요. 연애할 때 여자친구가 보낸 편지를 갖고 가서 아이들에게 보여줬어요. 그 편지가 보통 편지가 아니었거든요. 두루마기 편지였어요. 펼치면 교실 앞문 입구에서부터 뒷문까지 쭉 이어지는 A4 용지 수십 장을 붙인 편지였어요. 학생들이 놀랐죠. 지도 교사도 놀라면서 저한테 '선생님 같은 분이 진짜 선생님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웃음)."
교생실습을 가서 아이들에게 자신의 여자친구가 쓴 편지를 보여주는 산교육을 했다. 장문의 편지를 보낸 주인공과는 장문의 편지를 받은 얼마 뒤,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 헤어진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라기주의 눈가가 촉촉이 젖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아픈 연애가 끝나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할 즈음 라기주는 예비 아내에게 말했다.
"사랑 때문에 아프거나 절망하거나 슬퍼해 보지 않은 사람과는 결혼할 마음이 없습니다. 사랑 때문에 아프고, 사랑 때문에 슬펐던 사람, 그런 사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준 겁니다. 나의 과거사 때문에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지장이 생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라기주는 중등교사 자격을 얻었지만 교사의 길로 가지 않기로 했다. 평범한 회사에 입사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처음 입사한 곳은 어린이 책을 주로 만드는 삼성당 출판사였다. 출근해 보니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다. 도살장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조를 만들기로 했다. 노조를 만들자마자 회사는 탄압을 했다. 조합원 전원이 해고되었다. 삼성당 노조 위원장을 맡았다. 다음 해에는 민주출판언론노조협의회가 생겼고 사무차장을 맡았다. 그때부터 라기주는 노동조합 활동을 생업으로 이어 간다.
"사실 저는 굉장히 낭만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에요. 때론 몽환적이기도 하고요. 길을 걷다가 하수구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도 '아, 저건 하수구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아냐. 산골짜기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살았는데 조직생활을 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애써 외면했고 알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보았어요. 내가 생각했던 낭만, 시로 배운 낭만이 아니라, 밑바닥 사람들이 보였어요. 잃은 것은 '낭만'이고 얻은 것은 '사상'이에요(웃음)."
낭만을 잃은 라기주는 '시'를 그만 써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남들은 잡혀가고, 구속되고, 고문당하고, 죽는데 내가 시를 써? 시 쓴다고 세상이 바뀌나?'라는 자괴감이 들어서다.
2021년 12월, 라기주는 민주노총 선전홍보실 일을 끝으로 은퇴를 했다. 2022년에 우연히 민족작가연합에서 노동자문예학교를 연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다. 그해 3월에 개강하는 제1회 노동자문예학교를 수강하고 4월에 수료를 했다. 민족작가연합은 노동시, 민중시, 통일시를 주로 쓰는 곳이다. 1년에 두 번 <민족작가>라는 문예지를 낸다. 라기주는 2022년 여름호에 '고백'이라는 시를 써서 신인상을 받았다. 공식적인 등단인 셈이다. '고백'에는 라기주가 절필한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고백
친일문학을 했다는 서정주의 글에 침을 카악 뱉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미당 서정주와 얼마나 다를까
나도 미당이 살았던 시대에 살았다면
미당처럼 적당히 부역하고 영달을 꾀했을까
명예롭게 양심을 지켜 일제의 유혹과 만행에 맞서 싸웠을까
내가 80년 시퍼렇던 군부독재 시절
시 쓰기를 포기하고 세상 밖으로 도망친 것은
나는 절대 윤동주나 김남주 같은 시인이 될 수 없다는 두려움에서였다
그들처럼 불의한 시대에 맞서 올곧은 시를 쓸 자신이 없었다
훗날 누군가 내 글을 보고 시대에 역행하여 노동자 민중을 짓밟고
탄압한 정권과 자본에 대해 미일 제국주의에 대해
찍소리도 못한 소위 어용시인이라는 낙인이 두려웠다
총칼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 용기도 없었지만
권력의 눈치를 보아가며 자주 민주 통일에 역행하는 시를 쓴다는 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했다
포탄이 난무하는 그래서 산야가 초토화 되고
민주주의 파괴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민중이 고통 받고 있는데
산업현장에서 생존을 외치는 노동자들이
자본의 탐욕과 수탈 착취로 죽음을 강요 당하고 있는데
저항하고 투쟁하지는 못할 망정
삼천리 금수강산을 노래하고 산업평화 어쩌고 저쩌고 하는 글을
쓸 수는 없었다
조국이 두 나라로 쪼개져 오도가도 못하는데
총질을 해대고 미사일 핵폭탄으로 전쟁의 위기를 부추키는데
구시대 악법 중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살아
노동자 민중 지식인의 목소리를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두려워 도망치고 외면하고 방관하고 있는데
내게 미당의 친일본 반민족시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대놓고 싸우지 않고 단지 부역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변절하지 않은 시 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도 원고지 위에
'국가보안법 철폐 주한미군 철수 조국통일 완성'이라 써놓고
한 글자도 더 써 내려가지 못하고 있는데
라기주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세 명 있다. 첫 번째는 어머니, 두 번째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카잔차키스, 세 번째가 전태일이다. 전태일의 삶을 이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노동운동을 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이 개선되길 바랐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했다. 전태일은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역사를 일곱 권의 일기로 남겼다.
전태일이 1970년 8월 9일, 쓴 일기에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중략"라는 대목이 있다. 라기주는 이 글을 보고 그의 사상가적, 혁명가적, 작가적 기질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전태일을 우리 시대의 최고의 작가라 꼽는 이유라고 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큰 성을 하나 짓고 싶었어요. 바다 위에 떠 있는 성을 만들어서 장애인이나 어렵게 사는 분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운영해 보고 싶었어요. 문학을 꿈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외투를 벗어 주기도 했고,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서 호빵을 사주기도 했어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연민이 컸나 봐요.
그동안 노동운동을 했으니까 은퇴 후에는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활동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서대문구청 구정 평가단 활동, 마을 돌봄 공동체 활동, 아파트 동대표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뭔가 허전하더라고요. 생각해 보니까 글 쓰는 것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거였어요."
라기주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이 글 쓰는 재주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주위에서 잘 쓴다, 잘 쓴다, 하니까 그 말에 세뇌되어 잘 쓰는 줄 알았다. 라기주의 친구들은 '왜 아직 시집을 안 내냐, 사비를 털어서라도 비용을 댈 테니까 올 연말에는 꼭 시집을 내라'고 한다.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긴 척 더 나이 먹기 전에 시집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시라면서 나지막이 읊었다.
"최고는 되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할 줄 아는
결코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미친 듯이 사랑할 수 있는
언제나 마음으로 믿고
영혼으로 사랑하는
늘 푸른 하늘빛으로만
커가는 사람
인간 나기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음나눔유니온 홈페이지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