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는 사람이 좋다. 그냥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이 만드는 사람. 제가 만드는 것과 그것이 만나 부닥치며 벌어지는 광경들을 즐거워 하는 이가 좋다. 세상에 없던 것이 있게 되고, 벌어지지 않을 것이 빚어지는 일. 비롯할 창에 지을 작, 창작과 창작하는 이를 나는 애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7월 중순, 세찬 빗줄기가 중부지역을 휩쓸고 지나간 얼마 뒤였다. 문화의 도시이며 만남과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고을 전주를 찾았다. 지난 5월 영화제를 찾았다가 독립서점 경원동샵의 책장을 계약한 덕분이다. 전주까지 가는 길 대전 관저동 <관저마을신문>을 방문해 열의 가득한 편집회의를 참관했고, 또 그 주변 어느 카페에서 내가 쓴 평론을 좋아한다는 이들과 만나 팬사인회 비스무리한 것도 했다.
또 작은 책모임을 진행하고, 인터뷰를 하고, 사귀고픈 이들을 불러내 시간을 가졌다. 미루고 미루었던 여러 만남과 행사들을 숙제하듯 해치우며 전주까지 이른 길, 마지막 남은 것은 내가 이 여정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경원동샵은 책장주들을 불러모아 이따금 반상회를 갖는다 했다. 저마다의 이유로 책장 하나씩을 임대해 작고 소중한 서점을 연 이들이다. 그 공통점 하나만으로도 서로에게 다가서는 데 거침이 없다.
이번 '김성호의 바로여기'에서 소개할 곳은 이날 반상회가 끝나고 찾은 뒤풀이 자리. '문화통신사협동조합'이라 이름 붙은 요상한 회사의 독특한 건물이다. 원도심 외곽 쓸쓸이 늙어가는 지역 가운데 선 이 건물에서 '전통주페어링' 행사가 열린다 했다.
술이면 꺼뻑 죽는 술쟁이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 잠시 들려 맛만 보고오자 한 것이다. 제 자식 선봬듯 다감하게 말씀하는 어느 술도가 대표의 말을 듣고서 밤 차표를 취소한 건 배필 우에 그럴 연, 짝지를 만나듯이 꼭 그러할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폐업한 목욕탕이 지역활성화 거점으로
문화통신사협동조합 건물 1층에 식사가 차려졌다. 식사를 위해 멀리서 와주었다는 주방장과 그를 돕는 전주대학교 조리학과 학생들이 있었고, 한켠에선 주인공인 술 또한 준비되고 있었다. 무대가 된 조합 1층 공간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주연인 듯 빛을 발하였는데, 개성 가득한 부분부분들이 나 이런 곳이오 하고 목청을 높이는 듯도 하였다
건물은 본래 전주 원도심 동네의 목욕탕이라 했다. 목욕탕이 폐업한 뒤 이를 사들인 조합이 이를 고쳐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 사는 고장을 무력하게 늙어가는 무엇으로 방치하지 않겠단 청년들의 움직임, 또 그를 응원하고 연대하는 마음, 아마도 그것이 이날 뒷풀이를 조합 건물로 잡은 것이 아닐까 했다.
목욕탕이란 평범하지만 독특하기도 하다. 목욕탕이 제 쓰임을 할 때는 평범한 공간들이 다른 쓰임을 얻자 이색적인 빛을 발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 1층은 본래 여탕이었다는데, 너른 공간 가운데 설치된 벤치인 줄 알았던 것이 뜯어보니 바가지로 물을 퍼올려 몸을 씻는 좌대다. 목욕탕의 흔한 석재마감이 그대로 붙어 있다. 한쪽엔 한때 전국적 유행을 탄 옥빛 선명한 석재 마감이 색다른 공간을 장식했다.
본래 무슨 옥탕이라 했던가. 페인트로 하얗게 덮어나가다 이거 이대로 놔두어도 제법 멋지겠군 하였던 공사현장의 판단들이 그대로 읽히는 듯하다. 모두 밀고 새로 짓는 일에 익숙한 21세기 한국인에게 남기고 고쳐 이어가는 온고지신의 태도가 새삼 인상적이다. 여탕이었을 공간 곳곳을 뜯어보다 보니 탕에서 몸을 불리고 나온 '아지매와 할마시'들이 좌대에 기대앉아 물을 끼얹고 떠들었을 풍경이 증기처럼 뿌려지는 듯도 하다.
직접 부수고 다시 만드는 데 참여한 조합 직원이 나서 우리를 안내한다. 남탕이었던 2층은 제법 분위기 있는 공간이다. 벽을 둘러 책들이 놓였고, 가운데엔 여럿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놓였다. 모임을 열고 대화하며 토론하는 공간이 옛 목욕탕 남탕 자리에 들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때를 밀고 몸을 씻던 옛 자리에서 글과 말로 혼탁한 무엇을 벗겨내는 일이 이뤄질 듯하다. 남탕이었던 이 공간이 그렇게 다르거나, 혹은 다르지 않은 쓰임을 다시 얻는 것이다.
쇠락한 구도심, 다시 붐비는 날 올까
3층을 돌아 옥상으로 나가려는데 두어명이 들어서면 옴짝달싹할 수 없을 법한 좁은 공간이 눈에 띈다. 문짝 없는 문 앞엔 '월간 그리움'이란 팻말이 붙었다. 바깥에서 들여다봬는 벽엔 자그마한 그림 한 점과 어디서 꺾어온 건지 나뭇가지가 붙었다. 뒤에 따르던 이가 말하길 '저 나무도 작품이에요, 심지어'라고. 심지어, 그 공간조차, 이 건물조차도 작품인 것이라고 소심한 나는 속으로만 응답한다.
옥상에 올라보니 사방이 트여 마을의 전경을 살필 수 있다. 오래된 기와들과 무너져가는 담벽, 출근길 지하철 나의 동료시민들처럼 빼곡하게 들어차 입김과 숨이 느껴질 듯한 건물들이 보인다.
동네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엔 차 한 대 없이 한가하기만 한데, 문화해설사 뺨치는 이가 말하기를 6~7년 전 저 위로 돌아나가는 길이 나기 전엔 한옥마을로 가려는 차들이 수시로 오갔다고. 도로가 마을을 한적하게도 번잡하게도 만드는 것이다. 도시의 계획과 정책이 중요함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그는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게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여기서 한쪽으로 십여분 나아가다보면 제법 절벽같은 언덕이 있고 낭떠러지 끝이어서 더는 무엇이 설 수 없는 그 끄트머리에 낡아가던 건물 하나가 있었단 거다. 높은 곳에서 저 멀리까지 트인 경치는 기본, 큼지막한 돌로 계단을 쌓아올린 그 집에서 낡아 못쓰는 건물이 아닌 어떤 아름다움을 그가 보았다 했다.
계약 단 몇 시간을 앞두고 놓쳐버린 그 건물이 싸그리 고쳐져, 그렇고 그런 현대적 건물이 되고 말았다 한다. 나는 구태여 그 오늘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붙잡아야 할 것을 잃고 있는 건 아닌지
씁쓸할 땐 마시고 즐길 일이다. 이날 마신 술, 그러니까 청명주로부터 순애, 황금뭐시기소주를 거쳐 대비모주에 이르는 여정은 현실의 시름을, 그러니까 바로 다음날부터 펼쳐질 숨 가쁜 일상을 잊게 할 만큼 즐거웠다.
우리 땅에서 나는 우리 쌀로 빚고 덧 빚었다 말하는 술선생의 말을 들으며 괜스레 굴곡진 역사를 떠올리는 건 역사쟁이의 어찌할 수 없는 습관이다. 일제강점기 직전 조사된 1451종의 토종쌀품종과 35년 뒤 겨우 생존한 400여 종, 그나마도 농사라고 지어지고 있는 것이 없다시피 했던 비극을 이야기한다. 일본 품종과 그를 참고 삼아 개량하고 개발해 내놓은 품종이 뒤덮은 들판을 생각한다.
황금빛 들판은 우리의 기대만큼 자랑스럽거나 흐뭇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검고 푸르고 붉고 하얫던 우리의 들판을 너무나 빨리 잊어버렸다는 것을, 이날 먹고 마시며 웃고 즐기는 전주의 원도심이 잊혀져있는 것처럼. (관련 기사:
100년 만에 멸종된 토종쌀,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https://omn.kr/1xejk ).
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조합의 대표란 이가 나서 기다랗고 옆으로 부는 피리 비슷한 무슨 악기를 꺼내어 연주를 시작한다. 제 아이를 생각하며 연주한다는 그 곡조가 과연 술과 어울리는 정취를 자아낸다. 그는 정이 없는 사람인듯 앵콜은 전혀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대로 또 괜찮은 일이 아닌가.
쓰는 내가 빚고 요리하고 연주하며 공간과 모임을 만드는 이들과 만난다. 남들 사는대로 살아가라 윽박지르는 세상 앞에 제가 뚝딱거린 무엇을 던져내는 이들에겐 어쩐지 정이 간다. 한 자리에 그와 같은 이들이 모였으니 그를 이렇게라도 기록해보려는 것이다.
적다 보니 너무 먹고 마시고 논 이야기만 쓴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슬픔과 분노로 가득한 삶 가운데 피난처란 대개 먹고 마시고 노는 이야기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기사로 나가지 못할 글은 아닐 것이라고 은근 슬쩍 우겨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