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6일 국회 소통관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윤준병·김준혁·박수현·박희승·이재관 국회의원 등이 '항일독립운동 기점 정립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도 함께 참여했기에, 필자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의 상임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였다.
국회의원들은 기자회견에서 '독립유공자법'에 나오는 일제의 국권침탈사건이 무슨 사건을 가리키는지, 항일독립운동의 시작이 되는 운동이 무슨 운동인지를 국가보훈부가 정확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한국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인 필자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기자회견이었다.
독립보훈을 담당하고 있는 국가보훈부는 지금까지 "일제의 국권침탈(國權侵奪)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독립유공자법 제4조(적용 대상자)]를 독립유공자로 규정하고 포상을 하여왔다. 그런데 "국권침탈 전후"라는 표현 문구가 모호하여 문제를 야기시켜 지금까지 논란을 불러 일으켜왔다.
국가보훈부는 독립유공자법에 나오는 "국권 침탈"이 언제 일어난 국권침탈사건을 가리키는지, 국권침탈에 항거한 어떤 운동부터 독립운동으로 보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논란을 야기시켰다. 국가보훈부가 직무유기를 해온 것이었다.
이번 기자회견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은 지난 7월 29일에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윤준병 의원 대표발의, 20인 참여)을 공동발의하였다. 독립유공자법 일부개정법률안에서는 그동안 애매모호한 "일제의 국권침탈(國權侵奪) 전후"라는 문구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신설하고 있었다.
'"일제의 국권침탈(國權侵奪) 전후"란 1894년 일본군 경복궁 점령 사건·1895년 을미사변·1905년 을사조약·1910년 한일합병조약 등 일본제국주의로부터 국권이 현저하게 침해받았거나 국권이 침탈된 시기를 말한다.'
즉 일제의 국권침탈사건을 1894년 경복궁 점령 사건·1895년 을미사변·1905년 을사조약·1910년 한일병탄조약으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법률안의 발의로 그동안 "국권침탈 전후"라는 모호함이 깔끔히 해소되었다. 일제의 국권침탈사건 서술은 한국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필자는 그동안 국가보훈부가 하지 못한 일을 이번 일부개정법률안에 동참한 국회의원들이 마무리를 하였다고 본다.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
그런데 기자회견 다음날인 8월 7일에 <중앙일보>는 '유족수당도 모자라 독립유공자까지?...130년 전 동학혁명, 독립운동 인정 추진 논란'이라는 기사를 내서 "동학혁명은 독립운동 아냐"라는 주장을 폈다. 이 언론 기사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이 많았다. 이에 필자는 <중앙일보>의 기사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을 드러내고, 여기에 대해 논박하고자 한다.
첫째로, 기사는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학농민혁명은 잃어버린 대한민국을 되찾겠다는 게 아니고 조선 임금이 있는 봉건 체제를 지키겠다는 것이어서 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없고, 입법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임금이 있는 봉건 체제를 지키겠다는 것이어서 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의견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이주천 교수는 서양사 전공 역사학자이고, 2005년부터 뉴라이트 전국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하여 왔다.
같은 시기에 일어난 을미의병은 '조선 임금이 있는 봉건 체제를 지키겠다는 것이었고, 일제의 침탈에 항거한 독립운동이어서' 을미의병 참여자 145명에게 1962년부터 2022년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하였다. 마찬가지로 2차 동학농민혁명도 '조선 임금이 있는 봉건 체제를 지키겠다는 것이었고, 일제의 침탈에 항거한 독립운동'이었다.
을미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은 똑같이 조선 임금을 유지한 채, 일제의 침탈에 항거한 독립운동이었다. 물론 1차 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이 아니다.
윤준병 의원이 대표 발의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일명 '항일독립운동 기점 정립법')은 독립운동에 해당하는 2차 동학농민혁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다음으로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입법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으나, 사실(팩트)이 아니다. 윤준병 의원이 대표 발의한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일명 '항일독립운동 기점 정립법') 입법 취지는 2차 동학농민혁명(=독립운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입법 취지에 맞다.
윤준병 의원이 대표 발의한 입법 취지는 보도 자료에 나와 있듯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 제2조(정의) 제1호의 제2차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이라고 규정함에 의거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은 제정될 때 역사학계의 의견(정설)이 반영되어 만들어졌다.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자를 역사학계는 '독립운동가'라고 규정하고 있다. 역사학계는 항일무장투쟁을 독립운동으로 보고 있다. 역사학계는 "2차 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이다"라고 보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항일구국투쟁'으로 서술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2024년 현재 9종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모두 을미의병과 똑같이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를 항일구국투쟁, 즉 항일 독립운동으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동학농민혁명은 독립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의견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둘째로, 이주천 원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런 논리면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운 의병까지 국가가 보상해 줘야 하느냐"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 교수의 이 발언은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고 있지 않다.
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을 임진왜란의 의병과 연결시킴은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다. 이주천 교수는 서양사 전공자여서인지, 임진왜란 때의 의병에 대한 조선왕조의 포상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임진왜란(1592∼1598) 때의 의병 포상은 조선왕조에서 이미 넉넉히 보상했다.
"선무공신(宣武功臣, 1604 선조 37): 전공을 세운 공신(18인). 1등·2등·3등 공신으로 구분. 벼슬 등급의 승급, 녹봉지급, 노비와 토지 지급. 사례)이순신·권율(1등 공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605): 전공을 세운 공신(9,060인). 1등·2등·3등 공신으로 구분하여 공훈을 기록함. 의병 출신 많음. 특별 승진, 자손에 대한 음직 혜택, 부모에 대한 봉작, 본인이나 후손의 죄에 대한 처벌의 면제. 사례)김덕수 의병장(선무원종 3등 공신)
호성공신(扈聖功臣, 1604): 왕을 모시고 따른 공신(86인). 1등·2등·3등 공신으로 구분. 벼슬 등급의 승급, 노비와 토지 지급. 사례)이항복·정곤수(1등 공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왕을 모시고 따른 공신(2,475인). 1등·2등·3등 공신으로 구분하여 공훈을 기록함. 공신 총수 11,639인."(조인희, '17세기 초 임진, 정유재란의 공신 선정에 대한 고찰', <한일관계사연구>77, 2022 참조)
임란 의병에 대한 조선왕조의 포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주천 교수가 대한민국 정부의 임란의병 포상을 거론했다고 본다. 조선왕조가 넉넉히 임란의병 포상을 시행하였기에,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임란의병 포상을 할 필요가 없다.
셋째로, 기사의 내용은 보훈부의 의견을 그대로 따라 쓰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문화예술법안심사소위의 2023년 9월 19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윤준병의원 대표발의) 의결에 대해, 보훈부가 "형평성도 간과한 과도한 특혜를 주는 포퓰리즘 법안"이라고 밝힌 의견문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기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유족이 있는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481명에 불과하다. 참여자 481명도 엄격한 보훈부 공적심사를 거치면 숫자가 줄어들 수가 있고, 참여자 1명에 해당 후손 1명만이 보상금을 받기에, 많은 국가예산이 소요되는 것도 아니다. 무슨 과도한 특혜가 주어지는 포퓰리즘 법안이라는 말인가?
오히려 보훈부가 서훈에서 형평성에 위반하는 잣대를 대고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을미의병이 똑같은 항일무장투쟁이었음에도, 서훈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배제하고 있다. 보훈부는 서훈에서 2중 잣대를 대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진짜 문제이다.
2024년 3월 현재 1만 8018명 독립유공자 서훈 가운데 의병(을미의병·을사의병·병오의병·정미의병) 참여자 2722명이 서훈을 받았다. 그 가운데 을미의병(1895) 145명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오히려 특혜는 의병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런데 전봉준 등 2차 항일 동학농민혁명(1894∼1895) 참여자는 단 한 명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1962년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역사학자 이병도와 신석호가 독립유공자 서훈 내규를 "독립운동의 시작은 을미의병(1895)이다"라고 결정했다. 이 서훈내규를 가지고 국가보훈부는 일제의 국권침탈 사건을 을미사변(1895)으로 보았고, 독립운동의 시작을 을미의병(1895)으로 보았다. 보훈부는 이 서훈내규를 62년이 지난 지금 2024년까지 바꾸지 않고 있다. 강산이 6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연구로 인해, 1990년부터 "독립운동의 시작은 갑오의병(甲午義兵,1894)과 2차 동학농민혁명(1894)이다."(김상기 교수의 연구에서 첫 번째로 나옴)로 바뀌었다. 동시에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이 일제의 국권침탈사건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2차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항거하여 일어났고, 침략자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한 항일무장투쟁 즉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에 따라 이후 독립운동의 시작이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뀌었다. 독립운동의 시작이 2차 동학농민혁명으로 바뀐 지가 30년도 넘었다. 이후 수많은 논문과 저서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보훈부는 1962년의 "독립운동의 시작은 을미의병(1895)이다"라는 서훈 내규를 지금도 묵수하고 있다.
보훈부는 129년 전의 독립운동(을미의병, 양반주도)은 인정하면서, 같은 시기 130년 전의 독립운동(2차 동학농민혁명)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불공평과 불균형의 극치이다. 그래서 국회가 입법을 통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독립유공자 서훈의 형평성과 공평성의 취지에서, 국회의 동학서훈 추진이 합당한 조치라고 판단한다.